[전정희 칼럼] 가을은 사색의 계절, 사라지는 여백을 그리워하며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25/10/31 [12:10]

▲ 소설가 전정희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독서(讀書)의 계절이라 불리는 풍요의 상징 가을이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래서 가을을 더 손꼽아 기다렸는데 선선한 바람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초겨울의 쌀쌀함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지구 온난화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어쩌면 앞으로는 봄과 가을처럼 ‘여백의 계절’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이 극명하게 남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가 가을을 특별하게 여긴 이유는 청명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가을은 여름의 무성한 생명력이 사그라들고 겨울의 고요함이 찾아오기 전, 자연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색(思索)의 계절이어서다.

 

곡식을 수확하고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결실의 시간인 동시에, 무성했던 잎을 떨구고 모든 소유와 탐욕까지 비우는 성숙의 시간이 바로 가을이다.

 

푸른 하늘 아래, 맑고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 지난 시간의 실수와 회한을 벼려내고, 다가올 겨울을 맞이할 내면의 단단함을 준비하는 시간. 가을은 그렇게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심오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맘때면 유난히 가을을 타는 필자는 외로움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감수성이야말로 자연의 변화 속에서 자기 성찰을 멈추지 않는 인간의 본연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이 소중한 사색의 여백마저 빼앗아 가고 있다. 더워진 바다가 몰고 오는 잦은 태풍과 예측 불가능한 가을장마, 그리고 예년보다 흐릿해진 단풍의 색깔은 계절의 질감이 변하고 있음을 체감하게 한다. 계절의 문턱이 흐려지고 급격한 온도 변화가 일상이 되면서 우리는 여유를 잃고 급하게 다음 계절을 맞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라져가는 가을은 우리에게 ‘성찰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고 쉽게 소비되는 시대, 잠시 멈추어 서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백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있다.

 

가을이 짧아진다는 것은 우리가 사색하고 성숙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쓸쓸한 고백이기도 하다. 천고마비의 풍요로움 뒤에 숨겨진 깊은 고독과 사색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고, 찰나처럼 지나가는 이 감상적인 계절의 순간들을 더욱 아끼고 붙잡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서둘러 점퍼를 걸치고 짧아진 가을이 건네는 마지막 선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자. 덧없이 스러지는 낙엽처럼 스스로를 비우는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빨간 단풍, 노란 은행나무, 부지런히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의 알록달록 바래진 나뭇잎을 보며 잠시라도 가을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사라져가는 여백 속에서, 진정한 삶의 무게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덤이 될 것이다.

 

글 전정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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