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권신문] 1992년 대한민국(이하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 간 수교 관계에서 결정적 물꼬를 튼 인물이 있다. ‘한국 대통령의 화교 어의(御醫)’라고 불리는 한성호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한 박사는 역대 한국 대통령 중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이 세 분의 한의(韓醫) 주치의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성호’라는 이름은 국가 주요 인물 리스트 상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한 박사는 이시진의 ‘본초강목’ 등 의학서적들을 참고로 현대인들 속에서 성행하고 있는 ‘자연치유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난 1월 26일(일) 오후 기자는 ‘영등포아트홀’에서 열렸던 재한 중국교민 신년하례회 자리에서 한 박사를 만났다. 이어 저녁 6시부터 진행한 만찬장까지 대담은 이어졌다. 한 박사는 80세 중반을 넘기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였다. 그만큼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날 한 박사로부터 60여 년 세월 동안 한국에서의 생활상을 들을 수 있었다. 기자는 한 박사의 그동안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감명 깊게 읽었다. 태어난 조국 중국에 대한 자부심과 생애 대부분을 보낸 제2의 조국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는 한이 없었다. 강남 도산대로의 붉은 집은 그의 중국을 향한 마음 강남 도산대로변에는 5층짜리 빨강 건물이 하나 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여러 빌딩들 사이에서 유달리 당당함을 뽐내고 있다. 이 건물의 주인이 바로 재한 화교계의 수장인 한성호 박사이다. 그런데 이 건축물의 색깔을 두고 크게 두 번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했다. 한번은 한 박사의 한국 친구들이 어느 날 한 박사에게 촌티가 나는 붉은색을 버리고 세련미가 나는 다른 빛깔로 바꾸라고 권유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한 박사는 “나는 중국 사람이다. 중국 사람에게 붉은색은 길한 것을 뜻한다. 붉은색은 심장을 상징한다. 빨강은 변함없는 중국에 대한 내 마음과 같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후부터 친구들은 더 이상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중수교 이후 일부 대만(당시, 자유중국)의 독립을 외치는 세력들은 이 건물 색깔을 두고 “이건 ‘빨갱이(공산당이나 홍군을 비하하는 말)’ 색깔이다. 한성호는 빨갱이다.”라고 외치면서 한 박사를 맹비난했다고 했다. 이에 한 박사는 “그렇다. 이 한성호는 빨갱이다. 나는 중국공산당을 옹호하는 빨갱이다. 대만의 독립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빨갱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당당하게 응수했다고 말했다. 이 두 번의 일화를 한 박사는 떳떳하게 말했다. 이렇게 한 박사의 조국을 향한 애국심은 그 무엇보다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한 다음부터 한 박사에게 건물 색깔을 바꾸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다고도 했다. 남북이 분단된 한국에서 빨갱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한 박사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1948년 7월 인간 한성호가 한국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자유중국 대사관 관할 아래에 있던 한국 화교사회는 엉망진창이었다. 곳곳마다 기생집, 도박장, 아편관이 있었다. 그리고 집단 패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당시 청년 한성호는 이런 추악한 꼬락서니를 보고 너무 화가 치밀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 박사는 화교자치구역의 문서조장을 맡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화교사회의 추악상을 바로잡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혈기왕성했던 한 박사는 화교들이 타국에서 큰 망신을 당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화교기풍바로잡기위원회’를 설립해 자발적으로 부회장 겸 간사를 맡았다고 했다. 그 무렵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화교사회에서는 아편과 도박과 기생을 몰아내는 ‘대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한성호는 아편쟁이나 기생집 업주들과 원수진 일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오직 정의감으로 뭉친 티 없이 맑은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자나 깨나 화교사회의 추악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일념만으로 살았다고 했다. 이 땅에서 중국민족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신념만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밀사로 한중수교 물꼬를 열어 1988년 3월 1일 갓 취임한 대통령 노태우는 한 박사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리고 청와대 내 대통령관저에서 대통령은 “중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국내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이에 국가가 발전하려면 장기적으로 해외시장을 반드시 개척해야 한다. 중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거대시장이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라는 속내를 밝혔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노태우 대통령은 한 박사에게 “한중 양국이 서로 교류하지 않고 있는 국면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 양국 간 국교정상화 임무를 한 선생이 맡아주길 바란다.”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한 박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뜻에 따라 한 박사는 대통령의 밀사로 그해 4월 중국 ‘산동’으로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한 박사는 당시 산동성의 당 부서기이며 성장이었던 강춘운(그후 중국 국무원 부총리로 발탁)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즉석에서 중국 중앙정부의 비준을 얻어 한국과 산동을 전초기지로 삼아 한중 간 상호경제교류를 시작하기로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한 박사의 주도 아래 1988년 6월 16일과 8월 25일 두 차례 한중 국가 간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40년간 등지고 살아온 한국과 중국이 산동과 서울을 오가면서 조심스럽고도 우호적인 태도로 경제교류를 위한 회담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 나라와 일개 성 간 교류인 듯했으나 실제 한중 상호 교류, 무역, 경제 공조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한중 간 수교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동시에 외교성명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이와 함께 한국주재 ‘자유중국대사관’은 ‘대만대표부’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명동 중국대사관 건물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 외교관들이 명동 대사관에 입주하던 날 한 폭의 붉디붉은 오성기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주악 속에서 서울의 맑고 푸른 하늘 위로 서서히 솟아올랐다고 했다. 그때 한성호 박사는 그동안 말로는 다하지 못했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느덧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고도 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갈망해왔다고 얘기했다. 살아서는 중국인이 되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법률상 국민이 국민훈장을 수상하면 30여 종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은 국민훈장을 받더라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으면 각종 대우에서 제외하는 규정이 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한 박사에게 한국 국적을 취득하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하지만 한 박사는 그럴 때마다 정중히 사절했다고 했다. 오직 한 박사는 “살아서는 중국인으로 살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라고 말하면서 중국인의 존엄과 한중 양국의 우호관계만을 소중히 여겼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은 강대해져야만 한다 2005년 10월 어느 날 한 박사는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그곳에서 강연할 때 한 대학생의 “지금 어떤 국가들은 ‘중국위협론’을 꾸미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한 박사는 “그들이 중국위협론을 운운하는 것은 중국이 아직도 강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앞으로 중국이 정말 강대해진 다음에는 그들은 중국위협론이란 말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할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빈 구호를 외칠 때가 아니라 모두가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애국행위이다.”라고 역설했다고 말했다. 그 강연이 끝나자 북경대학에서는 한 박사를 MBA연합회 자문고문으로 위촉했다고 했다. 일순간 1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애국화교 한성호’를 연호하면서 한 박사의 싸인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말했다. 그날따라 북경의 밤하늘이 유난히 눈부셨다고 덧붙였다. 웃음을 머금은 한 박사의 얼굴이 광채로 빛났다. 청마해를 맞아 노(老) 신사의 마음은 온통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국에서 생활한 지 60여 년, 청년 한성호의 머리에도 어느덧 백발이 가득했다. 그동안 아무런 가식도 없이 중국인의 기개와 양심을 굳게 지키면서 떳떳이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날도 한 박사는 조국 중국의 평화와 부강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여전히 한중 교류와 경제 공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한성호(韓晟昊) 프로필> ▷ 1927년 8월 28일, 중국 길림성 장백현 출생 ▷ 1948년 7월, 한국에 정착 ▷ 위만시기 길림사도대학 졸업 ▷ 대한민국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 신동화한의원 원장 ▷ 미국 캘리포니아 골든주립대학 식품영양학 명예박사 ▷ 한화중국평화통일추진연합 회장 ▷ 주한중국교민회 회장 <저작권자 ⓒ 한국인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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