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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10강): 마르크스 정치학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5/12/13 [21:25]

 

 

 

[한국인권신문] ‘2015 하반기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노트한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서울시와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강좌는 ‘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마르크스’를 주제로 박영균 교수가 진행했습니다. 지난 9월 23일(수) 첫 번째 강의 이후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열 번째 마지막 강의가 있었던 12월 2일(수) 밤, 너무나 많은 미련을 남긴 채 건국대 상허기념관 4층 대강의실을 빠져나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에 대해 조금 눈을 뜨게 됐습니다. 그동안 우리사회가 맑스(마르크스)와 맑스주의를 금기시했습니다. 때문에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왜곡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 그동안 맑스에 대해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강좌가 많아진다면 시민의식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좋은 강좌는 차수를 늘려 더 많이 개설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박 교수의 강의를 전달체가 아닌 강의자 입장에서 다시 정리했습니다. 녹음이 아닌 노트 메모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필자 주).

 

 

화폐의 물신성

 

상품은 화폐로 환원된다. 상품은 ‘가치’와 ‘사용가치’를 갖고 있다. ‘상품A(물고기)’와 ‘상품B(돼지고기, 1kg과 1.5kg)’가 있다고 치자. 물고기를 팔려고 하는 사람에게 물고기 ‘사용가치’의 의미는 없다.

 

원래 상품을 제조할 때는 사용가치 때문에 만든다. 요즘은 생산할 때 가치를 보고 제조한다. 이때 유일하게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화폐’이다. 원래 화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이다. 노동자, 어민, 농민 등의 노동의 가치는 화폐를 통해 표현된다. 그 사용가치를 화폐로 나타내면서 화폐는 ‘전제군주’가 됐다. 이른바 화폐를 ‘숭상’하게 된 것이었다. 이를 ‘화폐의 물신성’이라고 하는데 ‘자본론Ⅲ’에서 ‘자본의 물신성’으로 완성됐다.

 

 

자본의 물신성이 화폐의 물신성으로

 

자본의 물신성, ‘현대’, ‘삼성’의 가치를 만들어 온 것은 노동자들의 노동이다. 노동이 들어가 만든 것인데 성장하고 나면 그렇게 만든 사람을 ‘오너’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본의 물신성’이다. 돈이 들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생산에 투자된 노동이 들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의 물신성이 화폐의 물신성으로 됐다. 자본이 화폐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화폐의 물신성=화폐의 구조=우리사회 민주주의 구조

 

화폐(전제군주)를 숭상하는 ‘화폐의 물신성’과 화폐의 구조, 우리사회 민주주의 구조는 같다. 주권은 주민 개개인에게 있다. 이전에는 주권이 신에게 있었다. 투표를 통해 대표를 뽑는다. 그리고 각 주민의 주권은 대표를 통해 표현된다. 서구는 이 구조가 잘 돼 있다. 그런데 투표율이 떨어지고 있다. 투표를 해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 탈정치화(무관심)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이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재현(representation)구조’의 문제점은?

 

대표로 표현되는 ‘재현(representation)구조’, 이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주민 개개인과 대표 간 권력의 등가성이 없다. 권력의 재생산 시스템이다. ‘국가의 국민을 안 할게!’하고 국민이 빠져나가면 국가가 없어진다. 때문에 바디유는 ‘묶어야’ 한다는 ‘더하기’를 주장했다.

 

 

States와 Nation

 

‘States(국가)’는 정치적 국가장치 개념이다. ‘상태’라는 개념 속에서 국가는 ‘더하기’이다. 반면에 ‘Nation(국가, 민족)’은 ‘근대국가’나 ‘민족국가’ 개념이다. 우리나라도 States는 오랫동안 있었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등. Nation이란 개념은 없었다. Nation(민족)은 신분계급이 없어야 한다. 조선시대 노비는 국가 구성원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하나 될 때 N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환상이지만 실재하는 것

 

집합개념으로 보자. 집합, {a1, a2}을 묶는다고 묶여지는 것이 아니다. 부분집합은 {a1}, {a1}, {a1, a2}, ∅이다. ∅는 없는 어떤 것, ‘환상’이다. ∅를 둘러싸고 이탈하는 사람이 나온다. 더하기를 하려면 ∅가 나와 묶어줘야 한다. ∅는 환상이지만 실재하는 것이다. 환상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를 할 때 ‘붉은 악마’들이 열심히 응원한다. 그런데 헛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하기 정치와 빼기 정치

 

바디유는 더하기 시스템인 선거는 투표로 지배체제를 생산하는 시스템(재현 시스템)이라고 비판했다. 랑시에르, 들뢰즈, 네그리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네그리는 초월적 시스템이라고 하면서 절대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이들은 차라리 제비뽑기로 대표를 뽑자라고도 했다.

 

바디유는 ‘빼기’의 정치를 주장했다. 빼기의 정치는 안 들어가는 것이다. ‘5·18’ 정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 국가는 투표로 해결하자고 한다. 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빼기의 정치이다. 빼기의 정치는 국립묘지를 만들어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말은 좋지만 현실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는 적대적인 두 세력의 투쟁

 

민주주의는 Democracy이다. 민주주의는 ‘Demo(대중)+cratia(힘)’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시스템(대의제)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느냐? 대중이 선출한다. 문제는 서로 다른 진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적대적인 두 세력의 투쟁, 즉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텅 빈 기표’

 

민주주의는 ‘텅 빈 기표’라고 했다. 서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두 세력 간 투쟁하는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집권하면 보수성향을 나타내고, 진보주의자가 집권하면 진보성향을 나타낸다. ‘나무(기표)’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나무(기의)’의 의미가 달라진다. 곰처럼 용맹스럽다고 하면 곰이 용맹스럽게 보인다. 곰탱이 같이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곰은 미련하거나 우둔한 것처럼 생각된다.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기표가 놓여있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헤게모니 투쟁은 담론투쟁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짜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 투쟁이다(라클라우, 무페). 언어가 물질성을 갖는다. 민주주의에서 헤게모니 투쟁은 ‘담론투쟁’이다. 담론투쟁은 무엇인가 진리나 옳음을 결정해가는 과정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과정인 것이다. 담론투쟁은 진리나 옳음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담론투쟁은 보편적 가치를 가져야

 

담론투쟁, 보편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옛날, 노동자에게 계급적 차별만 존재했다. 오늘날, 계급적 차별 외 생태문제(에너지문제)도 존재한다. 2020년 아니면 늦어도 2030년에는 석유가 고갈된다고 한다. 석유가 고갈되면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 자연생태계는 자연이 알아서 재생산하는 매카니즘을 유지한다. 물고기를 포획할 때 작은 물고기는 잡지 않은 것처럼. 핵, 기후, ...... 문제, 성적차별, 인종차별,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권력의 비대칭성

 

담론투쟁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 집합적 구조를 만든다. 담론투쟁으로 가면서 실제 사회에서 권력의 비대칭성을 고려하지 못한다. 새누리당이 프레임을 주도한다. 이에 새정치민주연합은 네거티브로 나아간다. 헤게모니 담론투쟁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그때마다 진다. 보편적 가치 담론투쟁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집합적 구조로 가져가더라도 민주주의는 해결되지 않는다. 권력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맑스의 국가 개념, 폭력의 독점

 

‘무상급식’ 얘기만 나오면 ‘좌빨’로 매도한다. 무상급식은 보편적 복지이다.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선별적 복지가 오히려 계급차별이다. 비대칭적 권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억압 장치(군대, 경찰, 교도소 등)들과 이데올로기 생산 장치(언론, 학교, 교회 등)들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종편(종합편성)’을 만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물리력을 어떻게 창출해? 고민해야 한다. 물리력을 만드는 방식, 마키아벨리와 그람시는 ‘집합적인 권력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권력적 조직을 묶어 세울 수 있는 것은 ‘조직의 쪽수’라고 했다. 맑스는 근대국가 개념을 ‘폭력의 독점’이라고 했다.

 

 

사랑이 최소한의 ‘코뮤니즘’

 

국가는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을 오히려 폭력으로 낙인을 찍어버린다. 국가는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다. 국가 폭력 자체가 문제가 된다. 노동조합 때문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로 못 간다라고 말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민주주의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노조가 없으면 생산은 누가 하나? ‘대안적 공동체’를 조직해 집합적 권력의지를 부추기는 것이 중요하다. 바디유는 ‘사랑’이 최소한의 ‘코뮤니즘’이라고 했다.

 

 

맑스주의 전제

 

맑스주의는 ‘이 사회는 분열돼 있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과 임노동’ 간 내부적 적대성을 표현한 것으로 그 사회의 한계지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윤율이 감소하고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줄어들면 ‘탈노동화’된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노동자가 필요 없게 되는 한계지점이 만들어진다. 여기가 직접민주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소규모공동체

 

가라타니 고진은 이런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고 했다. 따라서 자본 없이 살아가는 방식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소규모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규모공동체가 나오면 집단은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 형식인 ‘텅 빈 기표’에서 놓친 것은 민주주의 이상이다. 민주주의 이념(이상)으로 삶는 것은 자치, 즉 우리 스스로 우리를 통치하고 산다는 것이다(자기 통치적(self-ruling).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군주제

 

왕조가 좋을 수 있다.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다. 군주가 백성과 직접 결합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중간 권력을 나눠 먹는 귀족을 죽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백성이 살기 좋아진다. 왕권이 약화되면 사대부 권력이 커지고, 그들이 농민을 수탈하게 된다. 군주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혼합군주제’는 ‘사자와 여우’가 결합하는 방식이다. 군주가 민중과 결합되면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코뮌과 코뮤니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군주제를 찬성하지 않는다. 왜? 내가 내 삶을 스스로 통치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는 자기통치이념(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이를 최대한 살려 국가 차원에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코뮌’이다. 코뮌은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다르다. 당연히 코뮤니즘 역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같지 않다.

 

A와 B 둘 사이에서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Common이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 코뮌이다. 코뮌은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혀서 새로운 것이 탄생돼 만들어진 것이다. 무정부주의자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독재만 남겨뒀다. 코뮌을 이념으로 갖고 있는 것이 코뮤니즘이다. A와 B 공동체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Community이다.

 

 

코뮌을 반대하다가 지지한 맑스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이에 파리 시민들이 봉기해 ‘파리코뮌’을 세웠다. 맑스는 처음에 파리코뮌을 반대했지만 다음엔 지지했다. 프랑스혁명이 기존 자기국가를 수정한다는 것으로 분석하고 지지한 것이다. 파리코뮌, 즉 자치정부가 어떤 형태인지 알겠다고 하면서. 국가는 국가인데 ‘비국가’로 국가기간인 동안 대의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비국가

 

국가 스스로 권력을 코뮌에게 넘겨줬다. 스스로 국가임을 부정하는 국가가 비국가이다. 비국가는 점차 직접민주주의 형태를 도입하나 소멸된다. 지방자치, 공동자치 활성화가 정치적으로 엮이는 것이다.

 

 

옛날 좌파와 요즘 좌파

 

옛날, 좌파의 한탕주의는 국가권력을 뒤집는 것이었다. 요즘 좌파는 풀뿌리민주주의를 추구한다. 그람시가 주장했던 장기전 형태의 진지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독일 녹생당은 10년 만에 성공을 거뒀다. 지역에서부터, 즉 지방자치에서부터 민주화를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옛날 맑스주의를 했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잘 안 했다.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사람이 공동체주의자이다. 이와는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자유주의자이다. 기존의 가치, 규범, 문화를 중요시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 미국은 보편주의를 이념으로 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은 한국적인 주장을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마이클 샌델은 보수주의자다.

 

 

한국정치의 문제점

 

한국정치의 문제점은 보수정당 독점체제이다. 보수정당 독점체제를 돌파하는 것이 중앙정치에서는 쉽지 않다. 지역정치에서 풀어야 한다. 독일 녹색당처럼 지역에서 지방자치를 통해 민주화시키는 전략을 써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한국정치에서 자유주의자는 오직 노무현 대통령 한 분뿐

 

보수정당 독점체제에서 자유주의자는 오직 노무현 대통령 한 분뿐이었다. 그런데 ‘종북좌빨’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북좌빨’로 도장을 찍어버렸다. 권력의 비대칭성, 이명박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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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13 [21:25]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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