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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9강): 노동하는 인간 NO,향유하는 인간 OK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5/11/27 [21:22]

 

 

[한국인권신문] ‘2015 하반기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메모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마르크스’를 주제로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박영균 교수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계획된 10강 중 9강이 지난 11월 25일(수)에 있었습니다. 박 교수의 강의를 전달체가 아닌 강의자 입장에서 다시 작성했습니다. 녹음이 아닌 노트 메모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필자 주).

 

 

정보화 혁명이 가져온 정보화 사회 특징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정보혁명 시대가 왔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정보화 사회를 언급했다.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는 물리적인 형태가 없다. 정보 형태는 무한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유의 독점성이 완화돼 빈부격차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창의적 능력(일 + 문화)이 있으면 누구나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이를 문화사회라고 했다. 다니엘 벨은 탈(후기, post)산업사회에서는 지적 정보능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산업사회에서는 물질적 형태인 재화가 중심이 되지만 탈산업사회에서는 3차 산업(서비스업)이 중심이 된다고 했다. 빈부격차가 줄어들고 문화사회가 되면서 탈계급사회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정보혁명은 탈산업, 탈노동으로 인해 노동의 종말을 가져온다. 반면에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나 소련의 공산주의(현실사회주의)는 노동이 중심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노동의 가치는 노동의 신화이다.

 

 

노동의 신성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80년대 지식인들은 노동자를 우월하게 보아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생산한 이 가치를 소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동자는 신성하다’라고 하면서 노동자를 추켜세워 노동자를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자는 산업역군’이라고 추켜세웠다. 동·서양 공히 어머니는 신성하다고 한다. 이 말은 어머니의 여성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신화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작동방식이다.

 

서구 제국주의 개척 당시 동양은 신비스럽다고 했다. ‘신비스러운’은 ‘원시적이다. 비합리적이다.’라는 말과 같다. 즉, ‘동양은 원시적이다 비합리적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동양을 신비화시켜 착취하고 지배하는 논리를 만들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

 

맑스주의가 보는 노동은 근면·성실하게 노동한다고 잘 살 수 있는 길이 보장되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이미 세계는 결정돼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요즘 청년들은 노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 이전에는 근면·성실하게 일하면 그래도 잘 살 수 있었는데.

 

‘노동은 신성하다’, 맑스의 구호가 아니다. 근대자본주의 이념과 가치가 들어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했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찬양했다. 근대자본주의가 성립되는 시기에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말이 나왔다. 로크의 ‘시민정부론’은 미국 국가이념이 됐다. 로크는 민주주의 기본원리로 시민정부의 목적은 시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재산권은 우리가 노동의 대가로 얻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소유권이다.

 

로크는 ‘신이 다 같이 나누어 쓰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했다. 내가 노동을 했기 때문에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노동으로 뭔가를 덧붙였기 때문에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뭔가’는 ‘가치’이다. 이 세계의 90%는 인간의 노동이 만든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는 신이 내려준 것인데.

 

 

노동가치론

 

노동가치론(아담 스미스, 리카르도)의 원칙은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즉, 노동만큼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 노동은 가치의 아버지이고, 토지는 가치의 어머니라고 했다. 생산수단(공장, 토지, 기계 등; 5천)과 임노동(노동력; 5천)을 투입해 생산한 상품이 ‘1억+α(화폐)’ 가치를 가져왔다고 치자. 성장을 위해 재투자(+α)한다. 이때 임노동을 많이 투자할수록 당연히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자본주는 노동 가치를 높이고 임노동을 증대시켜 더 많은 이윤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간다.

 

 

맑스, 근면 성실은 ‘가짐’이란 감각으로 묶어 향유하게 하려는 것

 

근면·성실은 자본주의 구호이다. 절제해야 하는 것으로 멋이 없다. 맑스는 초창기 글에서도 근면, 성실은 절제를 요구하면서 향유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절제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짐’이란 감각으로 묶어 향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다양한 감각으로 향유할 것이 많은데 오직 ‘가짐’이란 감각으로 묶어 향유하게 하려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노동자혁명을 주장하지 않아

 

노동가치론이 맑스의 논리라고 믿는 사람이 90% 이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동을 숭상한다. ‘삼성공화국’은 삼성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다. 노동가치론을 주장한 ‘리카르도 좌파’ 톰슨 같은 사람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했다. 자본가가 이윤을 가져가는 것은 노동자 몫을 부당하게 뺏어가는 가는 것이라고 했다. 뺏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노동자들 몫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접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혁명을 부르짖었다.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의 노동가치

 

노동가치, 맑스는 각각 ‘사회적 생산관계’에 의해서 노동 가치를 생산한다고 했다. ‘자본-임노동(노동력)’, ‘영주-농노’, ‘주인-노예’ 관계에 의해서 노동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포는 상품(노동력)이다. 노동력이 상품(가치, 사용가치)이 돼 잉여가치(이윤)를 생산하는 것이다. 노동력 가치는 수요곡선과 공급곡선 사이 어느 지점에서 이러이러해서 결정된다. 노동력 가치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 직업이 뭐냐? 그 사회가 어떤 사회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과 임노동은 계약관계이기 때문이다.

 

 

노동력,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노동조합은 순전히 자본주의시스템의 계약모델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노동력은 필요노동(내가 받은 임금 몫)과 잉여노동으로 이뤄진다. 필요노동만 있으면 이윤이 안 생긴다. 절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은 잉여노동시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노동시간 연장은 착취이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방식은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것은 쉬지 않고 일하게 하는 방식이다. 속도전으로 노동 강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제표준노동시간(8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점심시간 빼고, 퇴근시간도 어정쩡하게.

 

 

과잉인구, 왜 청년인구는 줄어드는데 청년실업은 늘어나는가?

 

테일러시스템, 10초만 당겨도 쌓이면 엄청나다. 테일러시스템은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생산성을 높이고 필요노동을 줄이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노동 강도를 강화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로봇이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가 과학기술혁명을 만들어냈다. 극소전자혁명과 로봇(자동화)은 필요노동시간을 확 줄였다. 인간의 자동화 수요도 한계에 부딪힌다.

 

예를 들면 옛날에는 자동차 100대를 생산하는데 10명이 10시간씩 노동했다. 지금은 10명이 5시간 노동으로 만들어낸다. 잉여노동이 발생한다. 5명이 10시간 노동하는 정보화, 자동화가 되면 ‘과잉인구(실업자)’가 생겨난다. 청년인구는 줄어드는데 청년실업은 늘어난다. 인구가 줄어들어도 과잉인구가 돼버린 것이다. 결국 그 세계가 어느 정도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고용할 수 있는 숫자는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중앙대학교에서는 인문계열 정원을 줄이고 경영학과 정원을 엄청나게 늘린다.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생들은 그만큼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피 터지게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히려 희소성이 있는 희소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더 낫게 될 것이다. 결국, 예측할 수 없다. 재능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학과에 진학하면 기회가 생긴다. 희소학과라도 어느 순간 필요로 할 때가 온다.

 

 

정보혁명이 세대갈등 불러일으켜

 

정보혁명을 통해 고용숫자가 절대적으로 감소했다. 과잉인구가 생겨났다. 한나 아렌트는 과잉인구를 ‘잉여인간’이라고 했다.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사회 세대갈등은 정보혁명에서 비롯됐다. 정보혁명은 속도전이다. 나이든 사람은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적응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70년대까지는 산업역군이라고 추켜세우더니 쓸모없다고 내쳤다. 존재감을 상실해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 분노는 약자를 향해 갔다. 지하철 객실을 돌아다니다가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화풀이를 한다. 이것은 은폐된 테러이다. 테러는 죽음충동의 또 다른 표현이다. 테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일베충’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하한다. 자기보다 약자에겐 얼마나 심하게 비하하겠는가?

 

 

맑스에 대한 오해

 

맑스를 경제주의자(경제가 모든 요소를 바꾼다)나 기술결정론자라고 오해한다. 앨빈 토플러나 다니엘 벨은 기술이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고 했다. 이른바 기술결정론이다. 맑스도 이를 예견했다. 다니엘 벨은 자동화, 정보화가 문화사회로의 길을 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맑스는 문화사회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즉, 곧바로 문화사회로 가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맑스는 사회결정론자

 

맑스는 사회결정론자이다. 생산능력이 2배 증가하면 노동인구는 그 절반으로 감소하는 데 비해 노동시간은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한 만큼 과잉인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맑스는 여기까지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맑스는 정보화를 ‘자동화·기계화’로 표현했다. 자동화, 기계화가 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단축된다. 한국인이 1년 동안 먹고사는 데 필요한 식량은 쌀 100만 석이라고 치자. 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한국인 전체가 1년 동안 입을 옷 100만 벌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1년 365일에 100만 석을 생산하던 것을 1년에 200만 석, 즉 182.5일에 100만 석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182.5일로 감소한다.

 

 

가처분시간, 향유시간

 

먹고살기 위해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줄어든다. 집에서 먹고살기 위해 청소하고 빨래하는데 옛날에는 2시간 걸렸는데 지금은 1시간 걸린다고 치자. 이렇게 되면 1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이 1시간을 ‘가처분시간’이라고 한다.

 

70~80년대에는 먹고사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지금은 여가시간을 많이 갖는다. 가처분시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그것은 그 사람들의 향유시간이 될 수 있다. 나를 위한 시간이고,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다.

 

 

맑스의 노동해방은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 해방’

 

노동은 원래부터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었다. 여기서 맑스는 ‘노동해방’을 언급했다. 그러나 맑스의 노동해방은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다. 나는 통제를 받으면 노동한다. 모든 노동은 자본의 기획과 통제에 따른다. 나는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에 불과하다. 자본가에게 놀아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노동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노동의 해방’이다.

 

‘노동으로부터 해방’, 맑스는 노동을 찬양하지 않았다. 가기 가치를 실현하며 사는 것을 진짜 좋은 삶이라고 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향유하면서 살아가자고 했다. 생산능력을 높이면 노동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했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선택해 과잉인구를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나머지 향유하는 시간을 늘리자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하고 생산된 것을 다 같이 나누고 향유하면서 살아가자고 했다.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광분하는 이유

 

맑스는 노는 것을 좋아했다. 각 개인의 발전이 사회의 발전이 되는 것을 꿈꿨다. ‘연대’, ‘형제’ 같은 용어도 안 썼다. 'association', 자율적인 조직의 연합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사회의 길을 전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맑스주의자는 이에 광분한다.

 

맑스는 노동가치론도 깨진다고 보았다. 모든 공장에 로봇을 고용하면 자본주의도 끝나버린다. 왜냐하면, 임금이 없으면 소비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력 숫자가 줄어들면 이윤도 떨어진다. 노동가치설은 제대로 돌아갈 때 성립하는 것이다. ‘자본론’에는 노동자에 관한 얘기가 없다.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자본론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료를 기록해둔 노트이다. 사람들은 자본론은 보는데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은 안 읽는다. 오늘 강의내용은 정치경제학비판요강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정치경제학비판요강 노트를 기반으로 해 자본론이 탄생했다.

 

 

정보화시대 소유의 문제

 

로크는 노동가치, 즉 소유권을 정당화했다. 노동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소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화시대에서 생산방식은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페이스북의 가치, 사람들의 협력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페이스북이 주식시장에 상장돼 주커버거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5만 명 유저들의 힘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소유의 문제가 제기된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생산에 가담하고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지금 공장은 사회 전체로 확산돼 그만큼 생산이 확장된다고 했다. 여기서 복제 같은 노동소유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적 장치가 등장했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이다. 지적 소유권이 없으면 소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국가가 경제에 강제로 개입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

 

맑스는 온전하게 결정적 방식으로 교환해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을 ‘자본주의착취시스템’이라고 했다. 오늘날 경제 외적 방식으로 약탈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방식은 수탈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자본(시장)에 전면적으로 붙어있는 형태이다. 국가가 개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시장은 자본과 국가가 완전히 밀착돼 작동한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현대에 나타나는 문제점이다. 

 

앞으로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공멸하지 않으려면. 보편적 복지, 실업수당, 권리개념이다. 수혜개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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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27 [21:22]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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