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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8강): 마르크스가 ‘자본론Ⅰ’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5/11/20 [22:16]

 

 

[한국인권신문] ‘2015 하반기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메모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마르크스’를 주제로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박영균 교수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계획된 10강 중 8강이 지난 11월 18일(수)에 있었습니다. 박 교수의 강의를 전달체가 아닌 강의자 입장에서 다시 작성했습니다. 녹음이 아닌 노트 메모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필자 주).

 

 

맑스주의가 해체된 이유

 

1960년대 후반부터 서구에서 맑스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해체되기 시작했다. 물질토대가 의식의 상부구조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당 독재가 민주주의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맑스는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결정을 언급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다. 또한 현실사회주의가 민주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람시는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시민사회 윤리적 지도력을 주장했다. 반면에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 vs 과학’으로 구분했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성이라고 했다. 더불어 이데올로기 ‘생산 장치(학교, 교회, 언론 등)’가 있고, 이데올로기는 ‘수행적 역할(주체 호명)’을 하며 ‘객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호명이론’은 ‘누구누구, 00...’라고 부를 때 그 사람은 이미 이데올로기에 포위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노동자로 호명되는 순간 노동자로서 역할에 포위돼 스스로 노동자로서 충실히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망’의 사회적 지배, 탈현대는 근대 소비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대=상부구조’, ‘당 독재=민주주의’라는 정신은 기각하고 보아야 한다.

 

 

맑스의 자본론

 

맑스의 ‘자본론’은Ⅰ권만 완성됐다. Ⅱ, Ⅲ권은 완성되지 못했다. 원고로만 남아 있던 것을 엥겔스가 편집해 출간했다. 자본론은 단순한 경제학 책이 아니다. 맑스는 법대에 진학했으나 철학을 공부했다. 헤겔 철학, 그중에서도 헤겔 좌파에 합류했다. 철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학(스미스, 리카르도)도 공부했다. 원래 학문은 분야가 나눠져 있지 않았다. 학문분류체계는 근대 이후부터 생겨났다. 경제학, 정치학, 물리학 ...등으로. 요즘 다시 융합학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맑스 당시 학문은 융합학문이었다. 자본론의 부제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Capital(자본론)’에서는 자본이 주체다. 주체인 자본이 운동을 이끌고, 노동이 따라가는 것이다. 노동이 운동을 이끌지 않는다. 주인은 자본이고, 임노동은 노예로 ‘노동가치론’에 따라 자본론이 서술됐다. 로크는 ‘정치학’에서 이를 비판했다. 국가 임무는 소유권(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에 의한 소유를 정당하다고 했다(자기노동). 노동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의 90% 이상은 노동이라고 했다.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

 

근대에 이르러 노동이 가치라는 ‘노동가치론’이 등장했다. 이전까지 노동은 형벌이었다. 일반인들은 ‘노동가치론’을 맑스 이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르주아 이론이다. 첫째 아담 스미스, 둘째 리카르도 같은 고전경제학자들의 이론이다. 맑스는 노동가치론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모순’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른바 ‘잉여가치론’이다.

 

1억 원(화폐)을 공장부지·기계·원료 등(5천만 원)과 임노동자(5천만 원)에게 투입했다고 치자. 여기서 생산(P)된 상품을 팔아 ‘1억 원 +α(5천만 원)’라는 새로운 화폐를 발생시켰다고 하자. 처음 화폐는 현물(공장부지·기계·원료)로 교환된 것이다. 상품은 새로운 화폐로 바뀌었다. +α가 생겼을까? 생기지 않았다. 사회전체로 볼 때 교환(유통)에서는 +α가 생기지 않는다.

 

 

노동, 임노동, 필요노동, 잉여노동, 잉여가치 

 

그러면 +α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생기는 것은 P(생산)밖에 없다. 결국 +α(가치)는 임노동을 통해서 생긴 것이다. 자본은 ‘부등가교환’이다. ‘임노동 = 임금 +α’ 관계에서 임노동은 ‘노동력(상품)’이고 임금은 ‘필요노동’, +α는 ‘잉여노동’이다. 잉여노동이 생산하는 것이 ‘잉여가치’이다. 여기서 임노동과 노동은 다른 의미이다. 임노동은 상품 생산에 들어간 노동력을 말한다. 이에 반해 노동은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집안 청소하고, 밥 짓고 운동하는 것 등을 일컫는다.

 

문제는 자본의 입장에서 잉여노동을 자꾸 키우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자본이 원하는 것은 +α를 최대한 증대시키는 것이다. 1억 원을 투입해 생산(P)한 상품이 ‘1억(5천만+5천만)+α(5천만)’로 나온다면 이때 ‘잉여가치’는 100%(5천만 대비)이다. ‘10억+α(5억)’으로 커지면 상대적으로 노동자 임금은 줄어든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소비가 늘어야 하는데 노동자 임금이 줄어들어 구매력이 떨어진다. 결국 분배의 불균형으로 인해 소비가 줄어든다.

 

 

이윤율, 잉여가치율

 

이윤율은 ‘P/(자본+임금)’이고, 잉여가치율은 ‘P/임금’이다. ‘10억(5억+5억)+α(5억)’에서는 이윤율이 50%이다. ‘100억(80억+20억)+α(20억)’이 되면 이윤율은 20%로 떨어진다.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나아간다. 자본가는 100% 잉여노동을 200% 잉여노동으로 올리기 위해 노동 강도를 높인다. 노동 강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사회적 갈등이 커지고 투쟁이 격화된다.

 

 

맑스가 자본론Ⅰ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노동가치론’을 통해 자본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윤율을 ‘0’으로 가정해보자.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지만. ‘자본론Ⅰ’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자본이 이끌고 갔더니 ‘이윤율 저하 경향의 지속’이라는 문제가 생기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노동가치론은 깨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은 여전히 자본론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자본론 관점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문제다.

 

 

가치, 그리고 투하노동과 사회적 필요노동

 

가치는 ‘투하노동(노동시간) +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말한다. 맑스는 ‘사회적 필요노동’을 가치로 보았다. 10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는 쌀 10가마를 생산하고, 장인은 만년필 한 자루를 만든다고 치자. 그런데 쌀 10가마보다 만년필 한 자루 값이 고가라면 상대적으로 고가 제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것을 ‘사회적 필요노동’이라고 한다.

 

 

자본론Ⅱ, Ⅲ에서 다룬 내용

 

‘자본론Ⅱ’에서는 자본의 종류를 다뤘다. 화폐(금융)자본, 생산자본, 상업자본을 다뤘던 것이다. ‘자본론Ⅲ’에서는 이런 자본들이 얽혀서 경쟁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다뤘다. 맑스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다루지 않았다. 사회적 제 관계를 다뤘다. ‘나-□, 나-□, 나-□...’라면 관계 자체가 나를 규정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맑스는 자본주의를 ‘자본-임노동’관계로 규정했다. 자본론에서는 ‘인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은 관계(나-□)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에. 자본가는 자본의 입장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 맑스의 자본론은 이 시스템만 다뤘다. 자본가는 자본의 담지자다. 노동자는 임노동의 담지자다. 맑스는 사람을 다루지 않았다. 시스템 구조를 다뤘다. 사람은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아야 시스템을 벗어날 수 있다. 

 

이 사회는 기본적으로 교환(상품)이 되는 사회다. 나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한다. ‘연필(10자루)-필통(한 개)’, 질은 서로 다르지만 교환 이유가 있다. 똑 같은 질로 바꿔줘야 한다. 연필 10자루 만드는 시간과 필통 1개 만드는 시간이 같다고 치자. 이것은 질은 빼버리고 시간만 적용하는 것이다.

 

 

추상노동과 구체노동, 그리고 사용가치

 

노동시간(가치)은 ‘추상노동’으로 ‘인간 노동일반 환원’이라고 한다. 나무a, 나무b, 나무c 각각 개별성을 없애고 공통성만 남긴다. 그리고 뿌리, 줄기, 잎이 붙어 있어 광합성을 하는 것을 ‘나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원래 연필, 필통 그 자체로는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었다. 연필의 ‘사용, 쓰임(use)’, 첫째 쓰고 있을 때는 추상화된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급자족형태의 ‘구체노동(사용가치)’이 어느 순간 사회적 관계로 들어가면 ‘추상노동’이 된다.

 

나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어느 순간 먹다 남은 것을 갖고 시장에 간다. 시장에 가니 쌀이 있다. 쌀이 먹고 싶어진다. 이때 물고기 사용가치는 중요치 않게 된다. 추상노동이 중요해진다. 들고 나갔을 때 보는 것은 ‘가치’만 보는 것이다. ‘물고기-□, 연필-□, 쌀-□ 옥수수-□, ...’ 관계에서 ‘□ □ □ □ ...’ 하나의 형태로 고착된다. ‘물고기, 연필, 쌀, 옥수수 ...’ 사용가치는 필요 없다. 가치를 표현하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물고기를 들고 간 사람은 물고기 사용가치에 관심이 없다. 쌀의 사용가치에 관심이 크다. 교환을 위해 물고기 사용가치를 높여야 한다.

 

 

화폐는 전제군주

 

일반적으로 등가의 형태를 통해서 교환이 전면적으로 일어난다. 형태가 조개, 금, 은 등으로 결정되던 것이 역사를 통해 ‘화폐’로 바뀌었다. 화폐는 사용가치가 없는데도 누구와도 교환될 수 있다(가치의 체현화). 주인은 전제군주(화폐)이다. 

 

‘사용가치=구체노동=상품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을 규정해주는 것은 화폐이다. 10만 원의 10배, 100만 원이다. ‘어떤 사용가치?, 어떤 노동형태?, 어떤 질?’은 중요치 않다. 조폭이 마약이나 인신매매를 통해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우러러본다. ‘농민-노동자-사무직-전문직’, 서열을 결정하는 것은 화폐(임금)이다. 요즘은 사랑의 강도를 돈으로 측정한다. 어떤 선물인가? 혼수는 얼마나?

 

맑스는 화폐가 인간사회 자체를 너무나 황폐화시킨다고 했다. 화폐로 인해 인간적 관계가 사물의 관계로 변했다. 질은 없고 물건만 남았다. 자본주의 극단, 인간은 몸(노동력)을 파는 것에 불과하다. 노동시장, 인간을 사고판다. ‘노동시장’이란 말 자체는 인간을 상품으로 규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자유, 한쪽은 팔 권리만 있다. 또 다른 한쪽은 살 수도 있고 팔 수도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평등, 질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양적으로 등가물 교환이다. 결국 맑스는 상품의 자유, 평등에 불과하다고 했다.

 

 

근대사회는 양화된 사회

 

근대사회는 ‘양화된 세계’이다. ‘공간의 양화’, ‘시간의 양화’가 이뤄졌다. ‘구획정리’가 공간의 양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지도, 지리학이 왜 발전했을까? 제국주의 팽창은 공간의 양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간의 양화, 정해진 시각에 맞춰 출퇴근한다. 기계적 시각이다. 자연적 시간과 관계없다. 시골 농부는 날이 밝으면 일어나 일터로 간다. 어두워지면 잠든다.

 

시간과 공간의 양화가 공장의 모델이다. 시간과 공간이 권력을 체현화하도록 돼 있다. 테일러시스템은 시간과 공간의 분절이다. 신체(몸과 마음)를 파괴하는 것이다. 신체가 시간과 공간에 종속된 것이다. 기계의 시간이 신체를 규정하고 행동을 제약한다. 사람의 생명리듬은 기계적 리듬이 아니다. 화장실을 간다. 배가 아프고 고프기도 한다.

 

 

장소성과 고유성을 살려야

 

서울시가 복원을 시작했다. 청계천을 복원했다. 북촌 골목길을 살리고 있다. 반듯반듯한 길이 아닌 옛날 길 그대로 상품화했다. 조선시대 원형을 보존하면서 도시공간을 살렸다면 파리보다 더 아름다운 도시가 됐을 것이다. 파리에서 볼만한 것이 뭐가 있나? 공간은 양적으로 구획하지 않고 질을 살려서 구성할 수 있다. 장소성을 살린 공간구축을 모색할 때 상품성이 살아난다. Local, 로컬리티(locality)의 고유성인 특이성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 Local의 반대가 Global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기계적 시간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옛날 사랑했던 사람이 떠오르는 생생한 순간, 현재보다 생생한 현재이다. 트라우마, 지나간 시간이 아닌 현재보다 더 강렬한 현재 시간이다. 양적으로 볼 수 없다.

 

양화된 세계의 상품적 세계, 인간 고유성이 드러날 때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 양화시킨 버전은 산업화 버전이다. 1970년대 이후 욕망은 필요한 것을 소비하는 욕망이 아니다. 똑 같은 자동차일지라도 독특성을 살렸다. 포디즘은 유연생산제도이다. 하드웨어는 같으나 장착되는 소프트웨어는 다양하게 만들어 다품종화했다. 다품종소량 생산시스템이다.

 

 

창조경제는 관용으로부터

 

똑 같은 것을 싫어한다. 창의성, 로컬성, 독특성이 있어야 한다. 글로벌은 로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이른바 글로컬이어야 한다. 로컬의 질을 보존하려면 공간의 장소성과 개인의 독특성, 창조성을 살려야 한다. 창발성, 복잡계에서는 다른 것들끼리 만나고 만나 중층적으로 겹쳐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온다. 창조정신의 핵심은 관용이다. 관용이 허용돼야 동성애자들도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의 독특성이 창의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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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20 [22:16]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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