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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6강): 알뛰세르 후기 - ‘이론적 실천’에서 ‘정치에서 이론적 개입’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5/11/06 [21:24]

 

 

[한국인권신문] ‘2015 하반기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메모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마르크스’를 주제로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박영균 교수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계획된 10강 중 6강이 지난 11월 4일(수)에 있었습니다. 5강이 끝나면서 예고된 6강 주제는 애당초 ‘알뛰세르 후기 - 그람시 비교’였습니다. 이날 ⌜‘이론적 실천’에서 ‘정치에서 이론적 개입’⌟을 하고 ‘맑스주의 역사(역사적 맑스주의)’로 들어가려다가 ‘~주의(~ism)’로 들어갔습니다. 필자가 ‘~주의(~ism)’로 번역됐기 때문에 ‘~주의(~ism)’를 이해하는데 다소 혼란스럽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6강이 끝나고 박 교수는 진도에 차질이 빚어질까 우려했습니다. 박 교수의 강의를 전달체가 아닌 강의자 입장에서 다시 작성했습니다. 녹음이 아닌 노트 메모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필자 주).

 

 

알뛰세르의 출발점

 

기존의 ‘사회주의’가 ‘공상적 사회주의’인데 반해 ‘맑스주의’는 ‘과학(이성의 화신)적 사회주의’이다. 맑스주의에 노동운동이 더해지면서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혁명 후 첫 번째 탄생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의 ‘스탈린주의’는 ‘당’이 ‘국가’가 되는 형태이다. 당은 ‘이성의 화신’이 됐고, 자연스럽게 당은 진리의 규준(기준)이 됐다. ‘과학’도 당에 의해 ‘판단’됐다. 과학이 정치(당)에 종속된 것이었다. 과학이 당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일뛰세르가 나섰다. 알뛰세르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알뛰세르, 철학의 역할은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 선긋기

 

알뛰세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단절선(문제틀)’을 그으려고 했다. 그 ‘선긋기’ 역할을 철학(이론의 이론, 메타철학)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론적 실천’으로써 학문영역 안에서 독자성을 갖고 있다. 이론의 실천은 이론, 의식, 관념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과학으로 바뀌려면 ‘이론적 정합성’이란 특성을 지녀야 한다.

 

 

종교, 이데올로기, 과학은 진리가 아닌 믿음

 

토마스 쿤은 진리는 이론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진리는 관찰된 데이터(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동설과 천동설이 싸울 때 지동설이 패했지만 둘 다 존재하고 있었다. 지동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존하다가 근대에 이르러 지동설이 승리했고 천동설은 사라졌다. 이처럼 종교, 이데올로기, 과학은 믿음이다. 하지만 과학은 이론적 정합성이 있는데 반해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이론적 정합성’이 없다.

 

 

알뛰세르, 철학과 과학을 구분해

 

알뛰세르는 철학과 과학을 구분했다. 철학은 이론적 실천으로서 ‘이중개입’이라고 했다. 철학은 초기에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를 끊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학이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이데올로기의 접합적 행위, 현실을 못 보게 해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가 실천적 생활의 장에서 계급투쟁의 동인이 된다고 했다. 즉, 이데올로기라는 믿음은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접합(접착제)적 행위’를 함으로써 ‘행위’를 만든다고 했다. 과학으로 가려면 현실을 보아야 하는데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못 보게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해방의 주체가 못 돼

 

노동자는 해방의 주체가 못 된다. ‘이명박근혜’를 가장 많이 찍었던 그룹은 소득이 낮은 계층과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 스스로 한국 민주화 핵심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현실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특권화시켜 지배계급과 같이 독점적 특권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특정한 이데올로기(믿음)를 공유하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한국사 국정화 이슈는?

 

‘한국사 국정화’ 이슈를 보자. 정부 측에서는 검인정교과서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집단에서는 교과서도 보지 않은 채 무조건 믿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얘기하니까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이데올로기고 진리이다. 그 이상 나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도 따지 않는다.

 

 

노동자 파업

 

노동자파업을 보자. ‘내 옆 사람(노동자)도 파업에 동참할까?, 믿지 못하면 파업에 돌입할 수 없다. 상대방도 같이 파업할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다 같은 노동자이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파편을 묶는 접착제이다. 이를 두고 ‘시멘트효과’라고 한다.

 

 

알뛰세르, 철학은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에 개입해야

 

알뛰세르는 철학의 역할은 이데올로기(투쟁 사이)에 대해서 끊임없이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끊임없이 선을 긋고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제거해야 현실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즉, 철학의 역할은 ‘선긋기’ 행동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이 때문에 ‘전위정당’을 만들려고 했다. 노동자와 노동자계급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자란?

 

노동자는 ‘무산자’와 ‘임노동자’로 나뉜다. 무산자는 지킬 게 없어 다른 피지배자의 가치와 이익을 위해 일한다. 임노동자는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한다. 임노동자는 자본에게 자기를 판 사람이다. 자본의 힘이 커지면 덩달아 자기 힘도 커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대기업 간에도 차이가 있다. 중소기업 노동자는 대 기업 노동자에 비해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연봉이 많다. 잔업과 특근 때문이다. 저녁이 없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고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발 디딜 틈도 없다. 노동자(정규직)가 노동자(비정규직)를 배척한다. 이런 노동자가 어떻게 세상을 바꿔?

 

 

알뛰세르, 철학은 이데올로기의 폐쇄성을 폭로

 

노동자가 임노동자 성격을 벗어나야 피지배계급의 보편적 가치·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 노동자와 임노동자가 분리돼야 피지배계급을 대변할 수 있다. 노동자가 피지배계급을 옹호한다고 믿고 농민이 노동자를 지지한다.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 선긋기를 통해 과학의 길을 열어주려고 했다. 철학이 이데올로기의 폐쇄성을 폭로하려는 것이다.

 

 

한국사 국정화 이슈, 황우여 장관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하나?

 

황우여 장관의 말을 믿으려고 한다. 한국사 책도 보지 않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확인하는 지점이 유물론이다. 한국사 검인정교과서로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 정부 관계자와 나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이 과학이다. 찢어서 보게 하는 것이 과학이다. 한국사 검인정교과서를 보게 하는 것이 과학이다. 철학은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를 선긋기하고 과학으로 가게한 후 사라지는 것이다.

 

 

알뛰세르, 철학의 한계

 

맑스·엥겔스도 맑스주의 철학은 역할이 끝나면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알뛰세르는 철학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에서 선긋기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철학은 과학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은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현실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이라고 했다. 이게 철학의 한계라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와 과학, 그리고 철학

 

스탈린주의는 맑스주의가 ‘세계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관점(세계관)’을 준다고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여기서는 과학은 없고 철학만 있다. 과학이 이데올로기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철학은 트집을 잡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감추고 있으니까. 만학의 왕이라는 철학과 과학은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데올로기는 눈을 멀게 하고 과학은 눈을 뜨게 하는데, 철학은 그렇게 하도록 선긋기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느냐?”고 물으니 박 교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어 항상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분해하는 ‘이론적 실천’에 주목했다. 끊임없이 선긋기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과학도 이데올로기와 분리된 후 이데올로기화되기 때문에.

 

 

그람시의 이데올로기

 

그람시는 이데올로기를 정치적, 실천적 수행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현실을 보게 하는 물리적 힘에 주목했다. 지적, 윤리적 지도력으로 발전시켜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게 하는 정치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서 ‘맑스주의 역사(역사적 맑스주의)’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필자가 ‘~주의(~ism)’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릴 것이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면서 ‘~주의(~ism)’에 대해 설명하느라 더 이상 ‘맑스주의’로 들어가지 못했다.

 

 

생산양식에 따라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로 진화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개인주의, 이기주의) - 사회주의(맑스주의) - 민족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했다.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는 ‘생산양식론’에 따른 분류이다. ‘생산양식론 = 생산력 + 생산관계’로 ‘생산중심’이다. 생산력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산량(산출비율)을 나타내는 것이다. 생산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역사에 대한 유물론

 

세계 안에서 자연과 인간 간 에너지가 오가는 관계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로 보는 것 이다. 역사가 성립하려면 사람이 살아있어야 한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살아있으려면 재생산(생존, 생산)돼야 한다. 재생산은 목숨과 생식을 의미한다. 생산이 작동되고, 생식이 작동될 때 역사가 성립된다.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얻는 곳이 자연이다. 에너지를 얻기 위한 활동이 생산이다.

 

맑스는 생산력으로 구분하지 않고 생산관계로 구분했다. 맑스가 말하는 ‘토대’는 생산관계이다. 맑스의 주도적 생산양식, 사회구성체제는 ‘토대 + 상부구조’로 돼 있다. 생산력에 따라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 생산관계이다. 생산관계는 ‘인간-인간-인간...’처럼 집단적 형태를 띠고 있다. 부족에서 씨족으로 분화하다가 분리된 후 싸운다.

 

 

노예제

 

노예제 이전 ‘원시공동체’에서는 계급도 없었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와 ‘노예주’ 관계이다. 노예주는 노예를 인간이 아닌 도구로 취급했다. 말하는 도구(말, 소처럼)일 뿐이다. 노예는 자기소유가 없었다.

 

 

봉건제

 

‘봉건제’ 사회에서는 ‘농노’와 ‘영주’ 관계이다. 농노는 반쯤 인간이다.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가 있다. 그러나 토지에 예속돼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쟁기, 낫, 삽 등 도구를 가질 수 있었다. 토지에 긴박돼 있었는데 이것을 ‘경제외적 강제’라고 한다.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자본과 임노동 관계이다. 임노동은 ‘인격적 존재’이나 ‘경제적 강제’ 상태이다.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인신구속으로부터 해방’과 ‘생산수단으로부터 해방’이 전제돼야 한다. 인신구속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나타났다. 인신구속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정치혁명이 완성됐다.

 

 

시장, 농노해방, 그리고 근대도시 탄생

 

봉건제사회집단 간 생산품을 교환(무역)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생겨났다. 시장이 생기니 농노들이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장으로 사람이 모여 근대도시가 탄생하면서 농노해방이 이뤄졌다. 이때 귀족들은 자본가로 변신했다. 영국에서는 귀족과 자본가가 타협했다(명예혁명). 프랑스에서는 싸웠다. 명예혁명, 프랑스혁명 이후 의회가 생겨났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생산양식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를 말한다. ‘사회주의’는 맑스주의이다. ‘공산주의’는 계급이 없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는 근대에 발생했다. ‘자유주의’, 아담 스미스나 로크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만 이성적으로 욕망을 조절한다고 봤다. 합리주의적 입장이다. 반면에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고 외부 힘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미스는 타자이익을 고려하는 시장자율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홉스는 공리주의 방식이었다.

 

 

자본의 본질, 그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자본의 본질은 인격이 아니고 탐욕이다. 자본은 자기가치를 증식시키는 가지이다. 자기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이기주의’다.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죄수의 딜레마’는 이기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내 이익을 취하면서 사회적 이익을 고려한다. 타산적, 계산적 이성이다.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근대 부르주아 집단으로부터다. 부르주아 집단이 정치공동체(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가진)를 하나로 만든 것이 민족이다. States(국가)는 행정기구이다. Nation(민족)은 문화적 상징체제로 ‘상상적 정치공동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은 ‘가짜’도 ‘허구’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힘이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 저항적 민족주의로 나타난다. 레닌도 받아들였다. 맑스는 전기에 민족해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에는 민족해방을 인정했다.

 

 

저항적 민족주의

 

우리는 ‘저항적 민족주의’다. 서구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 발전했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가장 융성했던 때는 제2차 세계대전 후였다. 동유럽에서 혁명으로 나타났다. 비동맹회의도 저항적 민족주의이다. ‘신식민지론’을 들고 나왔다. 1980년대 ‘탈식민지론’이 나오면서 저항적 민족주의는 깨졌다. 윌러스틴은 6·8혁명 이후 새로운 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민주주의(Demo-대중, Cracy-지배력)’는 ‘대중 지배(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파시스트 빼고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귀족이다. 그들은 통치원리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것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아르케’다. 민주주의는 아르케가 없다. 대중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대중 자신이 스스로 자기를 통치하는 것이 민주주의 이상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결합방식에 따라 ‘민주주의 + 자유주의·사회주의·민족주의’ 달리 부른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만 결합되는 것으로 배웠다. 미국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이다. 북유럽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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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1/06 [21:24]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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