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 경제주의 vs 정치주의(카우츠키 vs 레닌)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15/10/02 [01:15]

 

 

 

[한국인권신문] ‘2015 하반기 서울시민대학 대학연계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서울특별시와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원장 김성민)이 공동으로 주최한 ‘다른 세상은 가능한가? : 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에 대한 강좌의 첫 번째 강의는 지난달 23일(수)에 있었다. 이어서 지난 30일(수) ‘경제주의 vs 정치주의(카우츠키 vs 레닌)’라는 주제로 두 번째 강의가 진행됐다. 12월 2일(수) 제10강을 끝으로 종강하는 이번 강좌는 건국대 상허기념관 402호 강의실에서 매주 수요일이면 청강할 수 있다.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박영균 교수는 “레닌(1870. 04. 22. ~ 1924. 01. 21.)은 “피도 눈물도 없다. 사랑도 친구도 궁극적 목적인 혁명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제2강의 문을 열었다.

 

 

최초의 사회주의혁명가, 레닌

 

레닌은 소비에트연방(소련) 국가를 건설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고 했다. 레닌 사후 레닌을 방부 처리한 것은 사자(死者)에게 가한 엄청난 폭력이었다고 했다. 레닌은 생전에 죽으면 엄마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는 것이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1879. 12. 18. ~ 1953. 03. 05.)이 권력을 잡으면서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세력 대부분은 지식인이었다고 했다. 그중에서 스탈린은 지식인이 아닌 행동파였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지식인이었던 트로츠키(1879. 11. 07. ~ 1940. 08. 20.)와 대립했다고 했다. 러시아에서는 우상숭배가 없었는데 스탈린 때 조금 진행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엔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맑스주의의 기본은 집단지도체제

 

맑스주의는 집단지도체제를 기본으로 한다고 했다. 비서는 말 그대로 서기로서 회의록을 작성하고 그것을 돌리는 것이 임무라고 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론을 만들었지만 행동가(혁명가)는 아니라고 했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해 자본주의 모순이 첨예하게 되고 극대화될 때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유럽을 중심으로, 그것도 리더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베벨과 리프크네히트는 맑스·엥겔스와 카우츠키·베른슈타인의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이론 강령과 실천 강령을 작성한 사람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이라는 것이었다. 노동자국가주의를 지향한 제2인터내셔널(유럽 사회주의국제조직)은 그때 아주 잘 나갔다고 했다. 엥겔스가 죽기 직전에 사민당이 20%를 득표할 정도로.

 

 

원래 맑스주의는 국제주의

 

원래 맑스주의자는 국제주의자였다고 했다. 국제주의자는 민족․국가 이익보다 인류·국제 이익을 더 중시했다고 하였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국제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1914. 07. 28.~1918. 11. 11.)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 돼버렸다고 했다. 국제주의 입장에서는 국가 단위보다 전체 노동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어야 했는데.

 

그때 독일 의회에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국채발행 여부에 대해 격론이 붙었다고 했다. 첫 번째 토론에서 사회민주당 국회의원들의 반대가 우세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토론에서는 찬성했다는 것이었다. ‘리프크네히트(1871~1919)’만 유일하게 반대하고. 이처럼 독일이 국가이익을 선택하자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도 국가이익을 선택했다고 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맑스주의(사회주의)가 진보의 상징이었지만 민족과 국가 이익 앞에서 붕괴됐다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인터내셔널 와해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와해됐고, ‘바디유’의 표현처럼 무너진 ‘대재앙’ 시점에서 ‘레닌’이 등장했다고 했다. 대재앙 전까지만 해도 레닌은 카우츠키를 절대적으로 숭배했다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레닌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들 때 러시아는 ‘짜르(전제군주)’가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처럼 짜르의 비밀경찰에 의해 통제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레닌은 전위정당(지하정당, 혁명가들의 비밀결사조직)을 조직했습니다. 레닌은 ‘테러리즘’을 반대했습니다. 짜르를 문제시하지 않고, 좋은 짜르가 들어오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짜르 체제를 바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대중이 각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중조직(정당)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었죠.”라고 말하면서 전국적 정치신문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했다.

 

당 조직을 유지하려면 안 잡혀가야 하므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활동은 신문을 만들어 비밀리에 했다고 하였다. 기차역을 중심으로 지하조직을 만들어 신문을 배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배포조직 정보망을 이용해 사람들을 모았다고 했다. 이렇게 당 조직을 만들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는 것이었다. 1차 당 대회 때는 모두 잡혀갔다고 했다. 2차 당 대회(볼셰비키만의) 전에 플레하노프(1856 ~ 1918), 마르토프(1873 ~ 1923)와 함께 ‘이스크라(전국적 정치신문)’를 만들었다고 했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간 끊임없는 싸움, 그리고 러시아 10월 혁명

 

2차 당 대회 이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간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했다. 힘이 더 센 쪽은 멘셰비키였다고 했다. 트로츠키는 중간(멘셰비키도 볼셰비키도 아닌) 입장에 섰다는 것이었다. 멘셰비키(소수파)는 ‘당에 공헌하면 된다.’는 식이고, 볼셰비키(다수파) 레닌은 ‘입당해 반드시 직책을 갖고 활동해야 한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강한 조직, 직업적 혁명가 조직, 핵심 정예부대로 진짜 전위정당을 만들려고. 

 

1917년 10월 혁명은 볼셰비키혁명으로 멘셰비키와 결별한 상태였다고 했다. 원래 맑스주의(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레닌은 카우츠키(1854 ~ 1938)의 ‘외부로부터의 도입’ 테제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 외부에 전위조직을 구축했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가 뭣을 알아?’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투표에서 마르토프를 제쳤다고도 했다.

 

결국 ‘레닌주의는 엘리트주의 아니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외부 즉, 노동자 밖에서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당시 카우츠키 권위는 어마어마했다고 하였다. 오래전부터 레닌은 카우츠키를 추종했으나 ‘배신자 카우츠키’란 책을 썼다고 했다. 독일 의회에서 전쟁비용마련을 위한 국채발행에 관한 투표 이후에.

 

지젝(1949~)은 ‘반복하기’에서 레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차이가 나는 반복’이라고 했다. 지금 레닌을 불러오지만 옛날의 레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레닌이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어디서 실패했는가?

 

박 교수는 “레닌은 어디서 실패했는가?”라고 하면서 “첫 번째 사회주의혁명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사회주의를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레닌만 사회주의를 경험했습니다. 레닌만 사회주의를 실천했습니다. 소련 사회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회주의혁명에는 성공했습니다. 혁명 이후 사회주의사회 건설에는 실패했습니다만.”이라고 했다. 더불어 레닌은 혁명가로 성공했고, 물리적 사건을 만드는데 탁월한 사람이라고 했다. 레닌을 맑스주의의 ‘마키아벨리’라고 칭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판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으로 대체된다.’라는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 썼던 글을 인용했다.

 

 

국가, 힘, 그리고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

 

‘힘’을 얘기하기에 앞서 근대정치철학자 3인(홉스, 로크, 루소)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로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고 하였다. 이 형태가 가장 잘 발현된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기본적으로 로크의 ‘시민정부론’을 따른다고 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내놓았다고 했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달리 지주들과 귀족이 타협했다고 한 후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 대해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마키아벨리를 정치가로 생각지도 않는다고 했다. 국가는 현실(힘)을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치공동체는 어떤 힘을 결합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박 교수는 “마키아벨리는 강령·이념을 세웠습니다. 분열된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결합시켜(국민의 힘을 결집시켜)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국민의 힘을 결집시키는 이념·행위 체계로. 왕은 도덕적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군주 역할이라고 했습니다. 정치는 도덕이 아니고,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도덕적으로 사람을 모을 수 있다면 도덕적인 것을 버릴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보는 것은 말을 막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정치는 도덕이 아니므로 정당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국민이 잘 살면 되는 건가?”라고 반문하면서 사실 정치는 도덕이 아니라고 했다.

 

바디유의 ‘정화의 정치학’에서는 공산주의란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숙청을 한다고 했다. 바디유는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가 악이며, 악은 선의 이면이라는 것이었다. 선을 추구하다가 같아질 수 없으면 ‘에이 모르겠다. 깨자!’라고 하듯이.

 

 

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시민사회는?

 

박 교수는 레닌 이래, ‘80년대 민주화 이후 우리 시민사회도 이점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힘을 만들까에 신경을 썼다면.’ 하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도덕적인 것보다 백성을 잘 살게 해주면’이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계속해서 박 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됐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국가가 생겨났습니다. 1945년 이후 동서냉전체제 속에 전 세계의 1/3이 사회주의권을 형성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레닌은 마키아벨리적 극한사고(변증법)를 한다고 했다.

 

제1인터내셔널, 당시 일부는 조국방위를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일부는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시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은 내전이다!”라고 하면서 정체를 드러냈다고 했다.

 

 

혁명은 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박 교수는 “혁명은 누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05년 혁명도 사람들이 집회를 하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입니다. 1914년 레닌 일기에는 ‘내 평생에 혁명은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1917년 혁명소식을 듣고 귀국한 레닌은 4월에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부터’라는 테제를  갑자기 들고 나왔습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멘셰비키가 권력을 잡아 자유주의자와 연합해 임시정부를 만들었습니다. 1905년 혁명은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맑스주의가 제시한 두 가지 해방을 얘기했다. 인격적 해방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였다. 

 

당시 러시아에는 노예제는 해방됐지만 농노제는 남아 있었다고 했다. 농노는 토지로부터 반쯤 구속돼 있어 이사도 못 가고 죽을 때까지 토지와 함께 가야하는 신세라고 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혁명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아 공장도 없었다고 했다. 농민은 도시로 가지 말고 그대로 남아있어야 했다고 하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다음에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당(멘셰비키)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화론에서의 경제주의와 정치주의

 

“원시공동체→노예제→봉건제→자본제→사회주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서 가야 한다. 당에 대한 지지자를 끌어들여 센 놈이 나타나면 서서히 열성분자로 발전시켜야 한다. 운동발전단계엔 순서가 있다.”라고 했던 멘셰비키는 농민(농노)과 노동자는 야당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이처럼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진화론, 단계론이라고 한다고 했다. 여기서 핵심을 경제로 놓으면 ‘경제주의’가 된다고 했다.

 

이에 트로츠키는 발끈하고 무시했다고 하였다. 트로츠키는 “우리 안에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들이 혁명으로 가야 한다. 어떤 세력을 기반으로 할 거냐? 노동자, 농민이 핵심이다. 농민은 기회주의자이니 곧바로 노동자 단독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레닌은 “농민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농노를 억압해서 그렇다. 농민은 혁명성을 갖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이 결집해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라고 하면서 야당으로 남아 있는 것이 옳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부터

 

1905년 자생적으로 생겨난 노동자 소비에트(스스로 통치, 레닌이 만든 것이 아님)가 그 이후 쫙 퍼지는 것을 목격한 레닌은 “소비에트가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 4월에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부터”라고 주장을 펼쳐나갔다고 했다. 자기 부인도 급진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레닌은 “임시혁명정부(자유주의자와 멘셰비키 결탁)는 힘이 없다. 임시혁명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소비에트 힘이다. 1905년 만들어진 소비에트는 임시혁명정부를 지지한다.”라고 하면서 임시혁명정부가 소비에트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행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소비에트 스스로 국가권력이라고 스스로 자임하고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였다. 레닌을 싫어하는 트로츠키도 임시혁명정부 대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을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임시혁명정부를 몰아내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는데 당시에 죽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후 내전이 일어나 많이 죽었다고 했다.

 

 

계속 갈등하는 레닌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부터’를 끊임없이 얘기했던 레닌은 실제로는 계속 갈등했다고 하였다. “당에 똑똑한 사람들이 다 있다. 국가 통치의 핵심은 재화(생산, 소비)이다. 이것(전국적 회계와 통제)을 누가 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레닌은 소비에트가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는 것이었다. 당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계속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 소비에트는 공산당 수족이 돼 결국 공산당 독재가 됐다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민주주의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훈련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자유롭게 통치하는 것이 민주주의 이상입니다. 그런데 실제 대의민주주의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10월 혁명 이후 권력을 맡을 수 있는 주체(노동자)가 없어서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고 하였다.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볼셰비키(사회혁명당)가 다수당이 됐다고 했다. 그러자 레닌은 무력으로 훼방을 놓아버렸다고 했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고 정당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했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부터’라고 했기 때문에 소비에트가 정하면 된다고 했다.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이 지점이 사회주의혁명이 실패했던 길의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맑스의 자유와 평등

 

맑스는 인간 스스로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삶을 추구했다고 했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했다. 맑스는 자기발전이 사회발전이 되고, 사회발전과 함께 개인도 발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다 다르기 때문에 양적 평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질적 평등을 추구했다고 했다. 양적 평등은 조야한 공산주의 주장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맑스는 그 사람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파는 시장적 자유, 좌파는 경제적 평등(분배)을 주장하는데, 맑스는 둘 다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럽의 사민주의는 경제적 평등을 주창한다고 했다.

 

레닌은 사회주의혁명에는 성공했지만, 사회주의국가 건설에는 실패했다고 하였다. 국가권력의 주체를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이 국가권력의 주체인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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