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청 칼럼] 소국과민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20/12/21 [09:46]

 

[한국인권신문= 엄길청] 

 

역사에 축의 시대(axis)가 있었다. 기원전 800년을 전후하여 기원전 200년 즈음까지를 이어온 기간으로 동서양에서 다양하고 풍성하게 사상가들이 등장해 철학과 종교와 인문의 세계에서 오늘까지도 그 영민한 섭리를 전해주던 대 사변의 시대를 말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노자, 장자 등이 동서양에서 유사한 시기에 대표적인 축의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가들이다.

 

생활문명의 수준으로 말하면 서서히 청동기시대가 저물어가고 철기시대가 창궐하여 곳곳에서 전쟁과 살육이 끝이지 않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의 중국정부가 관할하는 지역에 많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고, 갖가지 사상들이 다툼과 논쟁을 지속하던 백가쟁명의 시대가 이와 겹친다. 오늘의 중국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 같은 민족문화 국가라기보다, 그 시기 시기마다 한 시대를 지배한 정치논리가 다르게 작동한 정치적 국가로서 지리적 근접성과 언어적 유사성이 있는 국가운영상의 통치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학자들이 주장한 사상으로서 <소국과민>이란 말이 있다. 가능하면 나라를 작게 하고 국민도 적은 사람들이 모여 법이나 문명이나 제도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소소하고 담담히 살아가는 무위자연과 현세이익의 나라를 표현한 말이다. 이는 오늘의 집권세력인 현 중국정부가 지향하는 중화사상의 제국굴기에서 보면 크게 다른 국가론이다.

 

당시에 특히 진나라의 옹호로 법가의 세도가 높아지면서, 다른 한편에서 소국과민이 남다른 사색의 향기를 보여주던 대응의 논리다. 그러나 진나라는 법가의 사상을 주로 인용하여 전제적인 나라를 확장해 나갔고, 그 후 초나라 출신으로 여타 국가들을 정벌한 유방이 한나라라는 개념적 통합국가론을 만들었다. 이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중국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숱한 다양성이 묻힌 연합부족 기반의 혼혈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한민족이란 개념적 혈통민족론을 내외에 강변하며 정치적 출신성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국가운영이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 인상을 준다. 우선 두 나라는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대통령제를 택한 나라이면서도 연일 국가권력을 놓고 대중적 대립과 미디어의 설전과 지역적 균열상이 정말로 자심(worse)하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인권이나 자유나 평등의 보편적 국가가치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권력진영을 만들어 국가운영의 주도권을 다투는 이전투구의 형국이다. 게다가 입이 가볍고 사나운 호사가들이 자기 개인미디어와 몇몇 패거리로 뭉치고 휘저어가며 나서고 있어서 더 세상이 잡스러운 노이즈로 어지럽다.

 

앞으로 미국은 이전의 우수하고 강력한 미국의 재기를 노리는 전통주의자들과, 인간적이고 호혜적인 개방주의자들 간의 국가권력 다툼이 이번 대선에서 보듯이 전쟁을 방불케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요즘 보이고 있는 국가운영 상황도 대저 카오스이다. 겉으로 보면 개혁과 보수의 다툼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서로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저마다의 가치지향성을 놓고 서서히 갈라서는 모습이다. 방송이나 신문은 이제 시대의 정론이나 전체의 공론은 아예 없다. 지금 미디어는 각기 자기 이해진영의 전략적인 나팔수이다.

 

게다가 개인들의 사회관계망(SNS)도 말벗 나눔이나 친소소통이 아니라 서로서로 정치적 의견이 흡사한 사람들로 압축하고 갈라지는 편 가르기 양상이다. 이럴 거면 과학기술은 왜 발달하여 오로지 패거리와 분파뿐인 네트워크 소통사회를 초래하게 했는지 정말 과학자들에게 묻고 싶다.

 

급기야는 이제 무리마다 사람마다 통용하는 화폐도 금융도 상거래도 서로 다른 것을 사용할 소지마저 엿보인다. 이미 전자결제와 가상화폐가 나오면서 세상은 급속히 거래와 투자의 방식과 테두리가 각자의 소통커뮤니티로 내밀히 구분되고 생활경제 활동이 폐쇄된 벽 안에서 분화되려는 양상이다.

 

우리 정부도 2022년부터 여러 코인들을 디지털자산으로 인정하고 거래커뮤니티에서의 투자차익에 대해 국가시스템이 개입하여 차익과세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보면 점점 부동산이든 코인이든 주식이든 중앙정부는 이제부터 세금징수에 집중하는 조세국가주의로 갈지도 모른다.

 

마침 이 시기에 남부지방의 광역자치단체들이 독립적인 지역통합의 소리를 내고 있다. 이미 광주와 전남이 행정통합을 선언했고, 대구와 경북도 행정통합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부산울산경남의 부울경지역은 통합을 넘어서서 아예 중앙정부와 일정하게 역할을 분리하는 자치적인 통합된 지방자치정부를 원하는 민심의 소리도 들린다. 여기에 경기도지사는 자기지역의 고유 지역화폐를 병행하여 중앙화폐와 같이 쓰자고 연일 논쟁을 벌인다.

 

서울을 시작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집값상승도 양상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점점 동네마다 단지마다 집값이 세밀하게 달라지고, 주민들 간에 주거환경과 생활여건의 차이를 들어 주택가격의 급수가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외곽의 일부지역도 이제는 예컨대 불과 걸어서 몇 분 차이인 광교와 수지의 집값이 차이가 크고, 실개천 하나를 두고 분당과 죽전의 차이가 크고, 겨우 도로 하나를 두고 일산서구와 킨텍스단지의 가격차이가 아주 크다. 이제는 집값이 지역과 주택의 가격 차이를 말하기보다 갈수록 공동커뮤니티 환경과 구성원들에 대한 공동체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마치 같은 비행기 안에서의 일등석과 삼등석의 차이 같은 느낌을 줄 정도이다. 단기간의 이런 변화가 참 놀랍다.

 

서서히 코로나 백신이 나오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 속에서 이렇게 나누어지기 시작한 국민들 간의 또래의식과 정보소통과 시대공감의 분열현상은 여간해선 다시 하나가 되기 어려운 분열의 변곡점을 돌아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서로 생각이 다르면 이제 다신 안 만나면 되고, 더 이상 소통하지 않으면 된다는 단절의 마음들이 속절없이 안으로 파고든다. 이게 소국과민으로의 진입현상일 수 있다. 이는 코로나가 준 역사의 필연적인 전환점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500년을 넘게 느리게 진화한 문명사상의 혁신과정이 있었다면, 이제는 우주속도의 시대를 만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저마다 전유되고 구분된 세상으로 삶의 굴레를 바람처럼 옮기고 있는 것이란 느낌이 강하다.

 

점점 내가 선호하는 대통령과 나의 지지하는 정부가 다르고, 내가 믿는 투자거래소와 나의 통용화폐가 다르고, 나의 종교문화와 나의 주거단지가 다르고, 나의 미래지식이 다르고, 나의 선호 자산이 다른 것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시기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지금 코로나와 4차 산업혁명이 돌발적으로 겹치면서 과거에 500년 이상을 관통하며 갈등하고 다투어온 인간의 가치관과 국가사상과 사회질서의 변화가 검은 바다의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아마도 이렇게 가다간 우리는 <비대면>을 넘어 누군가와는 서로 아예 보지도 않는 <비상면>의 시대를 부득불(impelled) 만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 즈음에서 2021년 4월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가 한파를 뚫고 예열을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이미 도시국가급의 글로벌대도시로 성장한 서울과 부산이 향후 중앙정부와 정부역할을 분담하자고 할 수도 있겠다. 혹자에 의해 차제에 중앙정부는 외교, 안보, 통일, 환경, 우주, 공해상 등의 대외적이고 전체적인 국가관리 상황을 관할하고, 구체적인 토지이용이나 영해사용, 경제와 사회, 교육문화, 보건의료 등 민생은 지방자치정부가 스스로 맡아하는 국가운영의 분담정치 개혁논의가 제기될 수도 있겠다.

 

이런 상정이 가능하다면, 우리 현대사에서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중앙정치의 진영대립과, 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촉발된 해묵은 지역갈등과, 주변국에 대한 근대사의 역사논쟁은 지방정부들의 민생자치 시대로 접어들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엄 길청(글로벌캐피탈리스트/글로벌경영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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