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칼럼]「달아 달아 밝은 달아…」

-아동학대/유기 그리고 성폭력 역사에 대한 부분적 성찰-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20/06/15 [11:33]

 

 

이혜경 문화기획가/연출가

 

※오늘도 아동학대, 성폭력 보도가 끊이질 않는다. 한 편의 연극을 통해 이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심청전」을 다룬 연극에 대한 나의 생각을 소개한다.

 

프롤로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청량하고 순진무구한 여자아이들의 노랫소리.

나는 그냥 먹먹해진다.

여성들에게 친근한 달.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

위로와 희망을 구하는 ‘달아 달아’일까?

탄식과 고통의 소리 ‘달아 달아’일까?

    

칠흑같은 어두움, 텅-빈 무대.

간단한 소도구만 어렴풋이 보인다.

천-천히 고장난 기계처럼 삐그덕 거리며 움직이는 군중들(코러스), 사람만한 인형들도 함께 삐그덕 거리며 움직인다. 영혼 없는 존재처럼.

산 자들인가? 죽은 자들인가? 그 사이 어디쯤 있는 그들의 존재와 삶, 소외, 질곡을 드러낸다. 그러한 배경 위에 심청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1970년대 작가 최인훈은 심청이가 실제 현실 속의 여자아이라면 겪었을 아동학대와 성폭력, 매매춘의 삶을 냉철한 현실 인식으로 그리며 ‘심청전‘을 무대 위로 소환했다. 윤광진 연출가는 이를 2020년의 현실로 다시 불러들인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효녀 심청이 이데올로기는 죽어버리고 재만 남아 흔적이 된다. 그리고 이 남아있는 흔적은 새로운 심청이가 되어 나타난다. 아직 온전한 생명이 아닌 유령이 되어 심청이가 돌아왔다.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이 연극은, 심청이는 새롭게 사건이 되고 의미가 되어 온전히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름, 그 부름에 응답하는 딸들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다는 중의 말에 심봉사는 덜컥 약속을 해버린다. 경솔하고 무능하며 이기적인 아버지. 그리고는 꿈속에서 저승사자의 위협과 부름에 시달리며 위기에 빠진 심봉사가 부른다. “청아-” 청이는 아버지의 부름에 응답한다. “아버지-”

    

가족을 돕는 일이라면, 오빠의 공부와 출세를 위해서라면, 도시에 나가 식모도 되고(50년대, 60년대) 버스 차장도 되고(60년대), 공순이도 되고(70년대) 몸을 파는 유흥업소의 영자도 되었다.(80년대)

국가의 외화벌이를 위해 파독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연예인 발급증을 받으며 관광기생이 되어 일본에 가서 몸을 팔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정신대에 팔려가 남의 나라 군인들의 성적 도구가 되어야 했던 딸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나라에 끌려가 유린당하며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화냥년이 되어야 했다.

    

심청이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청전’ 이야기 속의 청이는 몸을 팔아 바닷속 용궁에서 왕자님을 만나 왕비가 되고,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하고, 효녀 심청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의 심청이는 우리 역사 속의 많은 딸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멀리 중국 땅의 매춘 업소 ‘용궁’으로 팔려간 것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심청전을 이렇게 현실적 심청으로 전복시킨 작가 최인훈이 새삼 고맙고 존경스럽다. 내가 만난 많은 남성 작가들이 남성중심적 허위 의식, 혹은 나르시시즘적 젠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목도한 터이다. 그는 역시 냉철하고 엄격한 지성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허나 한국적 민족 미학을 추구한 듯한 원작은 시대적 한계를 드러낸 듯 여겨진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예술계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민족적인 것’,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느라 애를 썼다. 일제 식민지, 미군정의 지배, 갑자기 밀어닥친 서양문화의 홍수 속에서 민족공동체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리라.

    

지금 대한민국은 ‘민족주의 과잉’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 접근, 내용을 상실한 형식주의 미학, 그리고 나르시시즘적인 민족주의적 태도는 민주주의, 혹은 개인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나 지향보다는 훨씬 지배적이다. 어쨌든 심청이가 실제 겪은 이야기는 직시하자면 아동 유기, 아동학대의 이야기이다. 타국에 팔려간 한 여자아이가 겪었을 수난, 고통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절제의 미학 : 살아나는 리얼리티

    

바다에 빠진 심청이, 심청이를 집어삼키는 파도, 허우적거림, 고통의 바다를 무대를 온통 뒤덮는 ‘비닐 바다’로 표현한 것은 흔히 쓰는 수법이기에 보여지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클리셰가 아니다. 압축적으로 심청이의 삶을 표현한다. 고통의 바다에서의 심청의 움직임과 춤은 그것에 맞서는 힘이 넘쳐 아름답다. 심청이는 결코 나약한 여자는 아닌 것이다.

중국 땅, 매춘 업소 ‘용궁’에서의 심청의 삶은 끊임없는 유린, 학대, 폭력이다. 심청의 몸은 몸값이 치러지는 물건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매춘 업소에 조선인 남성 ‘김서방’이 등장한다. 매매춘 현장 안에서의 로맨스가 등장한다. 백마탄 왕자가 나타난 것이다. 많이 비현실적이다. 지식인 남성의 오만함인가? 착각인가? 나르시시즘인가? 이것이야말로 클리셰이다. 최인훈 작가도 윤광진 연출가도 그 벽은 넘지 못한 것이다. 그 로맨스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이다. 걸림돌이다. 나는 차라리 그것은 현실 이야기가 아니라 미쳐가는 심청이의 환상으로 해석하고싶다.

어쨌든 인삼 장수 김서방의 사랑과 도움으로 고향 땅 황해도 도화동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 심청이 또다시 만나는 것은 남성들에 의한 윤간이다. 처절하다. 심청이가 유린당하고 강간당하는 장면의 묘사가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관객들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관음증적이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방식으로 그 폭력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심청이의 고통, 유린, 착취 등 심청이의 리얼리티를 절제된 가운데 잘 드러내었다 생각한다.

  

수행성의 미학

    

극장은 하나의 헤테로토피아이다. 그것은 현실의 공간, 일상의 공간과는 다른 곳이다. 그러기에 현실에서 존재하는,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간이다. 우리 스스로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내면화하여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 되어버린 가부장적 문화에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메커니즘, 가부장적 국가 이데올로기,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심청이가 실제 현실 속의 여자아이라면 겪었을 실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잔혹한 현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꾸며낸, 아버지의 부름에 그것이 자신을 망치는 것일지라도 언제라도 응답하는 효녀 심청이의 동화가 아니고, 한국 사회에 살고있는 여성들의 민낯을 보여준다.

    

‘달아 달아…’에서 효녀 이데올로기는 죽었다. 그러나 심청이는 재가 되어 그 흔적을 남기고, 작가는 다시 거기에 뼈대를 만들고 삐그덕 거리는 심청이의 유령을 불러온다. 새로운 심청이, 아직 산 자는 아니다.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여성의 현실이지만 현재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의 의식과 문화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시작된 #Me Too 이후 한국 사회가 얼마나 성폭력에 기반한 사회인지가 가시화되기는 하였다. N번방 보도 이후, 한국 사회 남성들의 놀이 문화가 얼마나 여성,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며 폭력적인지도 보여준다. 이 황폐하고 폭력적인 사회, 폭력은 위계적으로 가장 힘없는 자에게 가혹하게 꽂힌다. 오늘도 뉴스에서는 부모가 자기 아이를 학대하고 유기하고 드디어 죽이는 현실을 보도한다.

    

‘달아 달아…’에서 현대사회의(동시대의) 젊은이들이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록음악에 맞춰 등장한다. 심청이도 등장한다. 누더기로만 남아버린 늙은 청이, 환상 속에 갇혀버린 눈먼 청이, 미쳐서 드디어 현실의 경계를 넘어버린 미친 청이가 되어서. 아이들이 말한다. “심청 할머니 얘기해줘요. 용궁 다녀온 얘기해줘요.” 심청이는 말한다. 늙은 청이, 눈먼 청이, 미친 청이가 말한다. “옛날에 내가 용궁에 살았는데, 울긋불긋한 기둥이…, 산호로 만든 의자가…, 산호로 만든 침대…, 구슬…, 금과 은이…, 여러 나라에서 온 돈 많고 힘센 왕자들이 모두 나하고 살고 싶다는 거야…. 하지만 난 우리 님…, 김서방…, 우리 아버지 찾아 돌아왔지….” 아이들은 다시 “청청 미친년, 청청 늙은년” 청이를 비웃으며 떠난다. 끝내 잔혹 동화로 끝을 맺는다.

    

늙은 청이, 눈먼 청이, 미친 청이가 되어버린 심청이를 외면하고 비웃으며 떠나갈 것인가? 아니면 심청이의 실체를 직시하며 사유하고 손을 맞잡을 것인가?

    

우리가 연극으로 올려진 새로운 심청이와 만나면 이 연극은 비로소 그 수행성을 발생시킬 것이며 관객에게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극장 밖의 현실에선 또 다른 주체가, 변화가 가능하기도 하겠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탄식과 고통의 노래일까?

위로와 희망의 노래일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 노래에서 “이태백이 놀던 달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혜경 문화기획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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