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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진정성을 담아낸 이 시대의 춤꾼 故 조갑녀 선생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9/05/07 [17:23]

 

 

[한국인권신문=백승렬]

일제 강점기 권번 이라 불렸던 남원 국악원 출신 조갑녀!

일곱 살 나이에 춤을 추기 시작해 아홉 살에 춘향제 무대에 섰으며 열두 살에 독무대를 가지며 어린 나이에 남원 최고의 명무라는 찬사를 받은 춤이지만 열아홉 나이에 결혼 과 동시에 자녀들과 가족들을 떠안아야 했던 어머니의 이름 뒤로 숨어버린 춤

‘춤은 맹랑한 것이여 아무나 출 수는 있되 아무나 되지 않는 것’이라시며....

    

우리 민족은 가슴 속의 응어리진 한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해왔다. 창이나 판소리 같은 전통소리는 물론 다양한 춤들이 이런 한의 정서를 대표하는 우리 민족 유산이다.

    

특히 춤은 우리 민족의 한을 몸짓으로 표현해낸 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일제의 민족 말살 시도에도 쟁쟁한 춤꾼들이 우리 민족의 춤을 목숨 걸고 지켜왔고, 우리는 이런 자랑스러운 민족의 춤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 중 민살풀이 춤은 살풀이 장단에 추는 춤으로, 손에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민춤이다. 춤사위는 살풀이, 자진모리, 동살풀이, 살풀이의 4단계 로 구성되어 있으며, 춤의 장단은 도입부 살풀이 56장단, 자진모리 32장단, 동살풀이 24장단, 마무리인 살풀이 8장단으로, 전체 120 장단으로 구성돼 있다. 민살풀이 춤은 살풀이춤의 원류에 가까운 것으로서, 가냘프고 애절한 서편제를 연상케 하는 등 군산의 지역적 음악 색깔을 빼닮은 춤의 특성을 보여준다.

    

민살풀이 춤의 명인 故 조갑녀 선생은 최승희와 함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춤꾼이다. 1923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조갑녀는 1931년 9세의 나이에 이장선 선생으로부터 민속무인 승무와 궁중무인 검무를 배웠다. 당시 집안 어른들이 이장선 선생을 집에 모시면서 조갑녀 선생은 동기들과 함께 검무를 배우고, 승무는 집 마당에서 혼자 배웠다.

    

조갑녀 선생과 춤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 '춘향전'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라북도 남원 출신 조갑녀에게 우리의 전통음악과 춤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갑녀 선생의 춤과 예술혼의 기반은 바로 남원인 것이다. 실제로 남원 지역에서 국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조갑녀 선생이 춤은 물론 풍류 음악도 연주했으며, 동편제의 소리를 했다며 그의 다재다능함을 기억했다.

    

조갑녀 선생 그 자체로도 민살풀이요 춤은 조선말기의 궁중음악과 연계된 상류 궁중음악이 지리산 권역의 민간영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조갑녀 스승인 명인 이장선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말기에 국가 음악 기관이었던 장악원에서 춤과 악기연주를 지도하셨던 명인 이장선 선생은 조갑녀 선생의 궁중음악, 궁중무의 바탕과 남원 동편제 판소리제에 큰 영향을 줬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식민지 암울했던 시기에 민살풀이 춤을 배운 조갑녀 선생은 "민살풀이 춤은 무거움이며 무거운 춤세는 야하게 춰서는 절대로 안 되고 기교를 부려서도 안 되는 무기교 속의 멋이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소품에 도움을 받거나 의지하지 않고 본인의 알 수 없는 마음의 깊이로 들어가 추는 무기교의 멋은 점잖고 담담한 마음으로 정중하게 춤 속의 법도를 지키면서 즉흥으로 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인의 진정한 마음으로 추는 무기교의 멋이야말로 민살풀이춤의 예술성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조갑녀 선생은 춤에 있어 누구보다 진정성을 추구했다.

    

조갑녀 선생은 매년 열리는 남원의 대표 행사인 '춘향제'에서 승무와 살풀이춤으로써 그의 춤을 세상에 선보였으며, 4회~ 11회까지 단독무대는 그의 차지였다. 하지만 혼인 후 가족에게 피해가 될까 염려해 춤과 거리를 뒀다. 이후 승사교 낙상식과 같이 굵직한 행사에서만 그의 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명무'를 저술한 구희서 선생은 조갑녀 선생의 춤에 대해 "그의 춤은 균형의 춤이고 자세의 춤이고 아득한 옛날에서 시작되어 면면히 흘러내린 오늘의 강물 같은 춤이다. 좌우 대칭이나 저울대 같은 균형이 아니라 움직이고 굴러가면서 각각 다른 말로 같은 무게를 달아내는 변화 속의 균형이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한국 춤 백년'을 저술한 정범태 선생은 "조갑녀의 살풀이춤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는 사람의 마음 또한 같이 움직여 넋을 잃게 하는 힘이 있다. 흐르는 듯 그만의 멋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깊은 감동을 주었다. 비록 그의 춤이 민속춤으로 불리지만 경쟁에 결코 뒤지지 않는 최고의 춤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조갑녀 선생의 예술성을 극찬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젊은 시절 활동을 중지했던 덕에 우리가락과 우리 춤사위를 고제(古制)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본인 스스로도 우리 춤의 정체성과 옛 춤의 맥을 그대로 지녔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춤은 반드시 선생님께 배워야 하며 다양한 춤의 기술을 학습하고 섭렵한 후 춤추는 사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본인의 춤을 출줄 알아야 진정한 춤꾼이 된다는 것이 조갑녀 선생의 생각이다.

    

그는 자식들 앞에서 춤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저 한사람의 아내로 여러 남매의 어머니로 춤을 밀쳐 두었지만 그의 명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조용히 두지 않았다.

    

팔순의 연세로 다시 무대에 섰고 여섯 째 딸인 정명희 씨가 어머니의 춤을 익히기 시작했다. 수 십 년 춤을 추지 않았던 조갑녀 선생에게선 마치 그동안 계속 춤을 춰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춤이 흘러 나왔으며 딸인 정명희 역시 술술 불러냈다

    

역시 대물림은 대단했다. 2011년 6월19일 예술의 전당 예악당에서 두 모녀가 손을 잡고 무대에 등장했다. 서 있는 것보다 오히려 춤을 추는 게 덜 힘들다 하셨던 때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때 그의 춤은 무겁고 깊은 춤사위가 호흡을 멎게 했다

    

2012년 12월 5일 남산 국악당에서 열린 외교관 초청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여정”(voyage to the beautiful world)에서 장사익 선생의 초청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잠시 춤을 선보인 선생은 그 뒤를 딸인 정명희씨에게 잇도록 했다. 이 짧은 춤이 결국은 조갑녀 선생의 마지막 춤이 됐다.

    

2015년 4월 1일 세상을 떠난 조갑녀 선생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이자 여섯 째 딸인 정명희 선생은 조갑녀 선생에게 받은 전통 춤 교육을 토대로 조갑녀류 전통 춤을 전승시키는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하면서 후학을 길러내고 있다.

    

정명희 교수는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된 것을 배워라. 마음을 모아라. 춤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이다. 배울 때는 법도에 맞게 배우고 실전에서는 너 마음 가는대로 해라. 그렇기 때문에 항상 늘 바르고 옳은 생각을 하고 정직하게 살아야한다"고 생전 조갑녀 선생의 말씀을 회상했다.

    

이어 "보통 삶에서 좋은 마음을 먹고 마음을 크게 가지고 살아라. 그래야 춤이 깨끗하고, 좋은 춤이 나온다. 몸짓은 정직한 것이다. 바르게 살아라. 옳은 생각을 해라 본인이 깨달을 때까지 쉼 없이 춰라. 나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췄다"고 춤에 대한 조갑녀 선생의 열정을 전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혼합이 성행하고, 깊이 보다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오직 춤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했던 조갑녀 선생의 철학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나가야 할 민족의 유산이라고 해도 넘침이 없을 것이다.

    

백승렬 01776646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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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07 [17:23]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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