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후기]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걸었던 순천 ‘조계산’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15/09/30 [20:07]

 

 

 

[한국인권신문] 지난 9월 21일(월)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순천 조계산에 올랐다. ‘선암사 매표소-대각암-장군봉-장박골 정상-영산봉 사거리-토다리’ 코스를 밟았다. 원래 송광사까지 갔다가 원점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토다리에서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귀경시간과 선암사 경내를 둘러볼 시간을 감안해 과감히 포기했다. 그리고 ‘토다리-송광굴재-큰굴목재-편백나무숲-대승암 삼거리-선암사’ 코스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송광사까지 1.2km나 되기 때문이었다.

 

06시 56분, ‘조계산 힐링센터·백운쉼터’를 나서 07시 02분 선암사 매표소에 이르렀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매표원이 출근해 있었다. 입장료 2000원을 지불하고 07시 05분에 그곳을 통과했다. 그리고 07시 21분 선암사 승선교 위에 서서 승선교와 그 주변을 사진에 담고 선암사엔 들어가지 않은 채 곧장 대각암 방향으로 이동했다. 선암사는 산행을 마치면서 둘러보기로 작정하고.

 

대각암으로 향하면서 선암사 전경을 DSLR에 집어넣었다. ‘태고총림’, 사찰 전체가 다 보이지 않을 만큼 큰 절이었다. 고요한 산사의 아침, 절 뒤로 펼쳐진 흰 구름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07시 36분, 대각암 전경만 찍고 곧바로 장군봉을 향해 올라갔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나보는 산죽이 필자를 반겼다. 오래전 백두대간, 정맥, 기맥 등을 산행할 때는 귀찮은 존재였다. 지금은 예전처럼 원정산행을 할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08시 38분, 바로 앞서간 두 청년에 이어 조계산 장군봉에 올라섰다. 그곳에 처음 올랐던 때는 십 수 년 전 이맘쯤이었다. 순천에서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산길이 넓지 않아 잡풀에 묻어있는 이슬이 온몸과 등산화를 적셨다. 고어텍스 등산화가 아니어서 신발 속으로 물이 스며들어 상당히 많이 불편했다.

 

당시 송광사 쪽으로 하산한 후 시내에서 목욕을 마치고 친구 (최)용남에게 전화했다. 고교친구인 용남이 (김)재근 변호사사무실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재근이는 중·고교 동기동창으로 두 번 정도 같은 반이었을 것이다. 용남이는 (장)영일에게도 연락한 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니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영일이 차로 주암댐 근처로 가서 붕어찜을 곁들여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그 후 시내로 다시 들어와 그들과 헤어진 후 초등학교 친구 승주네 노래방으로 갔다. 순천여고 규율부장 출신 여장부 승주 부인이 극진히 환대했다. 거기서 동창모임 시간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도 등산화가 마르지 않아 젖은 신발을 착용한 채 모임에 참석했다. 등산복은 여벌옷으로 갈아입어 괜찮았지만.

 

그날 이후 용남, 재근, 영일, 승주 등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착한교육실현협동조합’을 설립하고 협동조합학원이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계속 그럴 것이다. 왜 안 보고 싶겠는가? 그러나 참아야 한다.

 

온몸과 등산화를 적셨던 옛날과는 달리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었다. 기분 좋게 걸어서 09시 06분 장박골 정상에 섰다. 이어서 장박골 삼거리를 09시 21분, 영산봉 사거리를 09시 39분에 지나갔다. 그리고 10시 24분 토다리에 이르러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잠시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겼다. 송광사는 다음 기회에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경내로 들어갈 수 없었던 예전 생각이 일부 작용하기도 했다.

 

11시 13분 송광굴재(굴목재), 11시 54분 큰굴목재에 올라섰다. 토다리에서 큰굴목재까지 가는 동안 계속 이어진 돌계단이 필자를 무척 힘들게 했다. 큰굴목재 이후 선암사 방향도 마찬가지였지만 송광사 쪽보다는 다소 나은 편이었다. 도중에 ‘보리원’이라는 보리밥집에서 걸어놓은 현수막 앞을 지나갔다. 두 길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지점, 필자는 현수막을 따르지 않고 우측으로 갔다. ‘선암사로 향하는 길’이라는 현수막은 등산객을 유도하기 위한 광고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필자 결정이 옳고 좋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선원사’라는 절이 나타났다. 12시가 안 된 시간인데 스님들이 평상에 둘러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스님들께 다가가 선암사로 가는 길을 물었다. 스님들은 점심을 먹고 가라고 했다. 선암사 입구에 가서 먹겠다고 하자 곡주라도 마시라면서 담근 술을 한 잔 권했다. 피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마신 후 자리를 떴다.

 

이후 12시 27분, 편백나무 숲에 도달했다. 그곳은 야외학습장과 붙어 있었다. 이어서 12시 38분 대승암 삼거리를 지나 12시 47분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앞에 섰다. 그 문을 통과해 경내로 들어가 선암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13시를 넘긴 시각, 선암사를 나와 부지런히 매표소 쪽으로 이동했다. 매표소 건너편 건물에 순천시내버스 시간표가 붙어있었다. 여자 직원에게 물으니 순천까지 1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보통 속도로 걸어도 13시 30분 출발하는 순천행 버스는 탈 수 있었다. 그래도 순천에서 14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고속버스는 탑승할 수 없게 됐다.

 

여수공항에서 16시 20분에 출발하는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조계산힐링센터·백운쉼터’ 강석진 원장과 나눌 얘기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산으로 향할 때 강 원장이 필자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3시 30분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강석진 원장에게 전화했다. 강 원장이 회원들을 모시고 산에서 운동중이라고 하기에 얼굴은 못 본 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막내남동생은 힐링센터 입구에서 제수씨를 돌보고 있었다. 제수씨는 프로그램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런 제수씨에게 동생은 힘들더라도 방에 들어가지 말고 바깥에서 햇볕을 쐬라고 했다. 방에 있으면 침상에 눕게 되니 걷다가 피곤해 눕더라도 햇볕을 맞으며 평상에서 누우라고. 그런 제수씨를 잠시 남겨둔 채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수공항으로 이동했다.

 

‘내 고향 여수순천! 아!! 얼마 만에 와보는 것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밖에 올 수 없는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차안에서 동생과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친한 친구 용석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

 

신풍 그리고 여수공항 활주로, 그 밑엔 필자가 태어나고 자랐던 옛집이 잠들어 있다. 이 동생이 신풍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76년 상반기에 전라북도 김제로 이사했다. 순천에서 여수 신풍으로 가는 도중에 동생에게 물었다. “신풍 생활이 기억에 남아 있느냐?”라고. 동생은 얼핏 떠오른다고 했다. 그런 고향에 중병에 걸린 자기 부인을 데리고 나타났으니 그의 마음은 오죽할까!!!

 

공항 2층 탑승구 유리를 통해 옛 동네를 바라보면서 추억을 되새김질했다. 우리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어야 할 ‘소랑뎅이(학서마을과 광양만 사이 들녘)’와 ‘델리(학서마을과 봉화산 사이 들녘)’는 사라졌다. 지금 조금 남아 있는 ‘학서마을’과 ‘구암마을’, 그리고 옛 상태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이전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애양원’ 전경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우리 놀이터였던 ‘갱본(광양만 바다 이름)’에서 다시 헤엄치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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