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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길청 칼럼] 200세도 산다면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9/11/18 [11:28]

 

 

 

[한국인권신문= 엄길청]

 토마스 슐츠(thomas schulz)라는 첨단기술컬럼니스트가 2018년에 “200세시대가 온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의학적으로 암과 알츠하이머가 정복이 되고 그야말로 긴 세월을 살아 갈 수도 있다는 요지의 책이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온다면 소수의 엘리트들이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보았다.

 

2천년에는 예수가 등장하여 영적인 영생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하던 시절부터 그 신앙을 믿고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도들이 영생의 축복을 기원하며 살아오고 있는데, 이젠 엘리트지식인들이 여러 과학의 융합을 통해 실제로 아주 긴 시간의 삶이 가능해지도록 기술의 혁신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 책에는 인체가 기계를 입고 다시 기능을 회복하고, 인체가 부품으로 대체된다는 취지로 새로운 의학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미래 예언을 하고 있다.

 

예수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영생의 시대를 위한 종교적 삶의 근본은 땅위의 나라가 아닌 하늘의 나라에 부를 쌓으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부를 나누고, 부모를 잘 모시고, 이웃을 사랑하고, 어린이처럼 살라고 했다(마태복음 19장). 놀랍게도 예수가 당시에 남긴 영생의 삶을 위한 당부는 재물과 가족과 이웃에 비유한 아주 현실적인 주문형식이었다.

 

지금 100세 시대에 대한 생의 가능성과 그 암시는 상당히 눈앞에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데, 다시 어느 새 200세의 생명담론이 훅 하고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다. 기술의 획기적인 진화의 시대를 특이점(singularity)라고 하는데, 그 말을 토대로 생각해본다면 정말 200세 삶의 상상은 언젠가 찾아올 미구의 생명과학 임계질량(critical mass)같기도 하다.

 

인간의 세상이 이렇게 길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삶의 형식과, 일상의 생각과, 평생의 가치관으로 살아야 할지 참으로 막연하다. 지금처럼 국가, 기업, 가정의 삼두마차로 가는 경제체제로 가능한 일일지, 법과 질서와 윤리로 살아가는 미래인 것인지, 교육과 직업과 자산관리로 살아지는 상황인지도 현재로선 아무도 모른다.

 

과연 요즘 한국사회가 정치현안을 놓고 치열하게 거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회공유경제의 도입이나 자유시장경제의 존치만으로 이런 세상은 살아질 수 있을 것인지 누구도 지금은 감히 재단 할 수 없는 엄청난 화두가 바로 200세 인생의 가상주장이다.

 

그런데 토마스 슐츠는 이런 시대를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하여 열어 갈 것이라고 보았다. 실은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은 또 있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도 새로운 생명의 시대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주 강력한 두뇌의 과학자들일 것이라고 했고, 한국의 유기윤교수도 그의 논문(2017년)에서 2090년이면 0.003%의 소수가 창조적인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0.001%의 플랫폼 소유주와 0.002%의 플랫폼 스타(인공지능 포함)가 주도 할 것이란 말이다. 나머지 99.997%는 불안정한 단순노동자들(precariat)이라고 예견했다.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은 아니지만, 경제학에서도 자본주의의 혁신에 대한 연구에서 깨어있는 자본주의나 포용적 시장경제에 대한 주장들이 점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선한 자본, 선물과 기부의 경제행동 등이 점점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우리나라 어느 사회적 벤쳐투자회사의 이름에 ARK라는 이름이 들어간 사회투자전문기업이 있다. 영어를 찾아보면 방주란 의미의 단어이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서 쓰는 단어이다. 다른 사업으로 돈을 번 어느 독지가가 자기회사를 팔아서 얻은 자기자본으로 투자기업을 차려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하는 사업에만 투자하는 펀드를 운용하는 기업의 이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 장수시대의 두 가지의 삶의 방안이 어렴풋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즉 미래의 삶에는 “고도의 지식”과 “선한 자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갈 것이란 점이다.

 

지금 교육을 둘러싸고 우수한 학생을 구분하여 교육시키는 방식을 존치하느냐 없애느냐 하는 논란이 거세고, 그 추이는 근년에 영유아 보육에서 시작한 공공서비스가 이제 2019년 2학기 고3부터 고등학교 무상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도를 도입한 교육당국자들은 공정한 출발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초 지능 미래세대를 위해 국가사회가 준비해야 할 오늘의 교육환경은 공정한 삶의 기반만 필요한 것일까. 더 나은 획기적인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창조적이고 신기로운 개인적인 학습역량은 과연 천부적 개인소질과 개인재능에만 맡겨야 하는 것인지. 교육의 방식으로 더 많은 창조역량 인간으로의 지적이고 영적인 발전은 불가능 한 것인지.

 

요즘 어느 방송에선가 영재발굴단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이제 와서 왜 교육현장은 평범한 사람을 만들려 하고, 세상의 이목을 이끄는 미디어의 관심은 대 놓고 영재를 찾아다니는가. 우리가 사회적 교육으로 하려는 공공의 교육과 양육지원은 아이의 장래가 아니라 부모의 짐을 덜어주려는 것에 현실의 정치적 함의가 더 크다.

 

아마도 이런 세태가 이어지면 정말 미래의 결혼이나 교육이나 소비나 사회구성에서 점점 초 상류사회들이 평범한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은 아마도 소수의 상급교육이 별도로 학교가 아닌 사숙으로 이루어지고, 시장도 마트가 아닌 시크릿 가든으로 들어가고, 혼인도 그들만의 리그로 숨어들 소지가 충분하다.

 

이런 미래의 추정은 참 어려운 사안이고 불편한 주제이다. 그러나 누구도 피하지 말고 곰곰 생각해보아야 할 필수과제이기도 하다.   

 

상전벽해란 말이 있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다는 말로서 세상이 몰라보게 변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눈앞의 세상변화는 지금까지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남긴 우리사회의 부정부패와 부조리한 과거사 정리가 주된 이슈이다. 그러나 저 언덕 너머에서는 지금 장수의 삶을 살아가려는 새로운 생명력이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변화의 대응은 보편적 가치를 다루는 정치적 주제가 될 수는 없는 아직은 개별적인 선택과제이다.

 

근시안(myopia)이라 말이 있다. 나라답고 따뜻한 나라를 만들려고 정말 진의로 잘한다고 한 일들 중에는 국민의 미래관찰이나 자기대응을 모두 바로 눈앞에만 두게 하는 일은 다가올 미래에 더 큰 국가나 국민의 손실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현실정치는 그 속성상 당장의 사회문제를 떠나기 어렵다고 한다면, 국민들의 미래준비는 교육자들이 나서서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의 현장에서 조차도 자기진영의 논리에 함몰되어 자기 직장안정이나 자기 직업보상에 대한 기대만 키운다면 그야말로 소는 누가 키우겠는가.

 

정말 시대의 사표(a guiding star)가 되는 헌신적이고 위대한 스승은 어디에도 없는가.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믿음과 도덕과 지혜와 영감을 가진 미래세대를 키워 내는 참 스승을 기다린다.

엄 길청(글로벌캐피탈리스트/글로벌경영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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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18 [11:28]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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