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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길청 칼럼] 더 추워지기 전에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9/10/15 [10:33]

 

 

[한국인권신문= 엄길청]

우리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는 거리정치의 논쟁의 중심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국민적인 암묵적 논점이 들어 있는 듯하다. 우리 헌법에 자유민주주의가 건국 이래 분명히 정립된 상황에서, 또 이미 사유재산과 시장경제가 작동하여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불가의 이론인 사회주의가 미상불(indeed) 현실의 정쟁으로 작동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반공사상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던 시절에 함께 불온한 사상으로 취급되어온 사회주의는 그 이론적 구상에서 한동안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에게 한번 들여다보고 생각하게 해보는 일정한 구석을 가진 점을 우리는 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 자유 시장경제를 소개한 미국 조야에서도 요즘 들어 논쟁의 소지가 보이는 정치적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서방세계에서는 소위 전체주의 속에서 비효율과 저 생산적인 문제가 노정되면서 복지사회 정신으로 수정되어 자유경제와 자본주의에서 새롭게 병합하여 담아내고 있는 구시대적 사상의 원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왜 이 시점에서 이 문제와 만나야 하는 것을 우리가 처한 나라 현실과 사회문제에서 성찰해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이제 3만 달러가 되면서 일각의 생활상은 상당한 여유와 호사(luxury)가 등장하게 된다. 이른바 클럽문화가 형성되고 타운 하우스가 생기고 신분의 세습의 우려되는 소지가 어느 나라나 공히 이런 시기에 등장한다. 이러 시기에 특히 미래에 자식을 키우고 또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젊은 부모나 청년들이 기회의 불평등과 현실의 불공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 요즘 30대가 유난히 그런 사회적 성향이 짙은 것도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설명력을 갖는다고 본다.

 

그런 시기에, 우리는 이전에 인권운동과 민주화 사회에 일정하게 공헌한 당시 시민운동과 학생운동 리더들이 아직도 정치중심에 다수가 있으면서, 오늘의 불공정과 불평등의 대증적 방안으로 이전의 사회주의적 생각을 현실정책에 담아내려는 시도가 그들에 의해 나타나면서 이 치열한 논쟁은 가열된 느낌이다.

 

게다가 그런 중심적인 인물의 하나가 자신의 신변에서 제기된 또 다른 측면의 개인적인 불공정, 불평등 시비가 혼재하여 지금 일 년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바쁜 가을철에 각자의 국민마음을 단풍보다 더 붉게 다양한 상념(thought)으로 물들였다.

 

미국의 대통령이던 케네디가 현직에서 행한 연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much is given, much is required. 개인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은 사회적으로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부유층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노블레스 오블리지에 대한 연설내용이다. 

 

사실 이 말의 원전은 성경에 있다. 누가복음 12장 48절에 “the one who has been  entrusted with much, much more will be asked." 이런 문장이 있다.

 

사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 중에 그저 돈을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해서 그 자리에 선 사람은 분명치 않다. 대개는 하고 싶어서 준비하고 뛰어든 일이나, 우연히 시작한 일이 잘되어 시간이 가면서 그런 재정의 성과가 쌓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이전의 농업사회에서 소작인이 대부분이고 이후의 산업사회에서 근로자가 대부분인 가정에서 자라나 훗날 재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어떤 사회적 책무가 따르는지 사전적으로 학습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허약한 도덕적 기반 위에서 어쩌다 조금 더 내 것이 생기면 좋고, 때로는 욕심도 과해지면서,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보다 더 돈과 여유와 기회의 편익에 탐닉하는 모습들이 비쳐지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상처가 생기게 되고, 때로는 서운하다가 나중엔 분한 생각도 들게 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그 문제가 어리고 어렵고 나이 든 국민들의 문제에 비쳐지면 비판적인 식자들로는 사회를 부조리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 있다.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하면 항상 따르는 문제가 위험과 실패의 두려움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길을 잘 가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그들 중에는 자신의 자질과 노력도 기여했지만, 행운이 따르고 주변의 도움으로 큰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바로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찾아와야 하는 사회적 자각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지이다. 로마시대의 대부분의 상류층이 자진해서 전쟁터에 나가 대거 전사했거나, 영국의 명문사학인 이튼스쿨 졸업생의 수천 명이 나라를 위해 전사한 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남다르다.   

 

모두가 평등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워도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세상이 더 중요하다. 소위 갑질이란 이름의 사회적 홀대와 차별이 대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 중에서 일어나는 꼴불견들이라, 돈을 둘러싼 사회정의의 논쟁은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면 결국 공동체운영으로 점점 생각이 젖어들게 되고 개인의 자유가 제한이 불가피한 세상으로 생각이 미치게 된다.

 

어찌 보면 오늘의 한국사회가 겪는 문제는 뒤늦게 찾아온 부유층의 사회적 각성이자  미래 부유층의 도덕재무장일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선거를 통해, 또 집단행동으로 자신의 정치소신이 지켜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양심의 자유와 신념의 기초위에서 내가 존중하고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이념과 사상을 위한 개인의 행동적 실천을 통한 사회적 변화가 더 실질적이라는 점을 이 시점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인식해 볼 때라고 본다.

 

특히 내 가족의 재무적 여유와 후대의 도전적인 삶을 지지한다면 늘 세상의 낮은 곳을 돌아보아야 하고, 힘든 사람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눈을 뜨면 열망이 자라고 힘이 솟은 아침이 기다려지는 사람이라면 어둠에 가린 자리, 냉기가 서린 뒷골목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성공투자의 행운이 나만이 찾아든 외딴 오솔길에 있다고 전한 주식대가들의 한수가 있듯이, 의미 있는 삶의 행복도 내가 놓은 산길 시냇물의 작은 징검다리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 생경하고 낯선 사상의 국민적 논쟁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나눔과 배려의 자기약속으로 거두어들이고, 곧 추운 거리가 오기 전에 서로의 포옹과 악수로 용도폐기하면 좋겠다. 2019년 가을을 온 국민을 서로의 정치관으로 물들게 한, 한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정쟁의 한 가운데 섰던 한 50대 풍류논객(elegant debater)도 이제 스스로 내려와 가고 없다.

엄 길청(글로벌캐피탈리스트/글로벌경영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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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15 [10:33]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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