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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숙 칼럼]‘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는 ‘아모르파티’와 같은 맥락의 작품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9/07/01 [14:05]

 

 

[한국인권신문= 남정숙]

이러다가 진짜 평론가로 나서야 할까보다.

    

대한민국연극제에 출품한 16개 작품들을 다 보겠다고 페북에 허세 반/응원 반 올렸더니 한국연극협회로부터 5개 작품에 대한 평론을 부탁해 왔다. 한국연극협회에서 부탁한 작품 중 하필 첫 작품이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극단 백운무대, 전남팀)이다.

    

그 유명한 박근형 작가의 작품이자 2006년부터 지금까지 대학로에서 수도 없이 공연되고 안본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중적인 작품이자, 연극으로는 드물게 KBS 4부작 드라마로 제작된 작품으로 수많은 평론가들의 평론과 논문들과 관객 리뷰가 넘쳐나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저 문화마케터로서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의 성공비결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제작자들과 관계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된다면 만족하겠다.

    

연극계의 스테디셀러가 된 작품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이하 경숙이)’는 이미 고전이다. 2006년부터 수도 없이 공연된 작품이다. 작가는 ‘경숙이’가 몇 차례나 공연했는지 알고 있을까? 2006년 작품을 집필할 당시 작가는 ‘경숙이’가 이처럼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박근형 작가가 ‘경숙이’의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박근형 작가는 ‘너무 놀라지 마라’, ‘대대손손’, ‘청춘예찬’ 그리고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까지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라 뒤틀리고 폭력적이며 분열적인 가족이야기를 일관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경숙이’도 그 연장선상에서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라 ‘허울만 가족’, ‘가부장 권위의 추락’, ‘불륜과 사랑의 모호함’ 등 유교사회 이후 꾸준하게 강요되고 있는 ‘성스런 가족, 낭만적인 사랑’의 가치를 비틀고 내동댕이치고 있다.

    

 ‘경숙이 아버지’는 ‘마리아 미즈(Maria Mies)’가 그의 책 ‘가부장제와 자본주의(2014)’에서 주장한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이용해서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주장에 걸맞는 사람으로 부인과 딸에 대해 공공연한 모욕, 전시 중 가족방치, 축첩 등 가정 내 가부장의 다양한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박근형 작가가 가족제도와 가부장의 문제에 대해 이미 2006년도에 무대예술로 공공연하게 보여줬다는 것이 놀라왔다. 당시 사회적으로 위험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지 박근형 작가는 영리한 방법으로 논란을 비켜가고자 한 것 같다.

    

시대정신을 리딩하는 작가의 영리한 전략

작가는 ‘경숙이’의 시대적인 배경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로 설정하므로 관객들에게 당시 시대상황 상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피해가족에 대해서 이해와 연민을 갖게 했다. 가부장 아버지는 가정 내에서는 망나니고 폭군이고,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경제적 무능력자이다. 심지어는 경숙이가 출산한 아기를 빗대어서 괴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회에서는 떠돌이, 노름꾼, 예술가는 아니지만 장구와 타령 정도는 할 수 있는 한량이다. 그의 행동이 이해되는 것은 그 또한 시대를 잘못 만난 힘없는 소시민이자 기층민으로 표현하여 관객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게 하였다.

    

경숙이네 가족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경숙이 어머니 역시 진정으로 지고지순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준다. 경숙이 어머니를 아버지가 부재중에 다른 떠돌이인 꺽꺽이의 아이를 임신하게 하므로 여성들 역시 가정 내에서 가부장적 아버지의 일방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이해관계에 따라 기생하던 존재임을 알려 주는 반전을 감행한다.

    

경숙이와 경숙이 어머니는 아버지 부재 시에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가 데려 온 꺽꺽이라는 아버지 친구에게 기생하면서 유사가족으로 살아가게 하므로 가족의 의미를 관객에게 물어 본다.

전 세계 이야기에서 보통은 외부에서 들어 온 침입자들이 가족에게 기생하고 사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비해 ‘경숙이’의 경우에는 경숙이와 경숙이 어머니가 외부 침입자인 꺽꺽이에게 기생하면서 살게 하므로 예측 불가한 또 다른 반전을 보여 준다. 이러면서 전통적인 가족은 완전히 해체된 듯 보인다.

    

결론부분에서도 ‘경숙이’는 아버지가 계속 부재중임에도 불구하고 잘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기를 낳는 산모로 등장하는데 이때에도 경숙이 곁에는 아버지 대신 꺽꺽이와 아버지의 애첩이었던 자야가 함께 하며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언반구 말도 없고 누구도 관심이 없다. 이제까지 법적가족이 아닌 유사가족(?)들이 경숙이와 경숙이 어머니를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아름답지도, 보편적이지도, 자본주의적 가치에도 맞지 않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대 관객들은 물론 40대~60대 중장년 관객들까지 불러 모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와 ‘아모르파티’의 성공 이유

젊은 층 관객은 그렇다 하더라도 농본주의 셀로서 가족중심주의 등 보수적 가치를 존중하는 중장년층 관객들은 왜 자신들의 가치와 학습된 신념에 적절하지 않은 ‘경숙이’를 보러 올까? 어쩌면 연극 관계자들은 이에 대한 해답이 가장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가 김연자의 ‘아모르파티’와 같은 맥락의 작품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장르는 다르지만 두 작품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4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경숙이’와 ‘아모르파티’는 트로트처럼 대중적이고 연극을 보고 싶어도 대학로에서 볼 작품이 적었던(?) 40~60대 관객을 타겟으로 시대적, 감성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연극을 제작할 때 타겟이 중요하고, 니치마켓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둘째, ‘경숙이’의 기표는 무책임한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경숙이와 경숙이 어머니의 이야기지만 기의는 허울뿐인 가족주의의 해체와 가부장에 대한 혐오 등을 가리키고 있다. 만일 ‘경숙이’에서 기의와 기표가 같았다면 중장년층과 신세대가 함께 좋아하는 뉴트로 연극이 될 수 있었을까?

    

‘아모르파티’ 역시 기표는 트로트 여왕이 부르는 흥이 넘치는 중장년들의 파티를 말하는 것 같지만 기의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인생이란 붓을 들고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라며 중장년층에게는 긍정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변화된 시대의 가치관을, 신세대에게는 신세대들이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응원하고 있다.

    

연극을 제작할 때도 기표와 기의가 같은 필요는 없다. 작가와 연출가는 기의를 품은 재미있고 창의적이면서 대중적인 기표를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박근형 작가는 ‘청춘예찬’에서 용필이의 입을 빌려 “관객이 원하는데 씨발 써비스 정신이 하나도 없어! 프로야구나 청춘의 덫이 백배 낫다 십새끼들!”이라는 뜬금없는 대사에서 연극이 프로야구나 드라마처럼 재미있지도 않으면서, 관객이라는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들만의 작업으로 만족하는 연극계를 비판하고 있다. 나는 ‘경숙이’가 관객에 대한 박근형 작가의 배려로 만들어진 작품인 것만 같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고, 기승전결이 분명해서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고, 공감할 곳과 웃어야 할 부분을 전략적으로 잘 배치했다.

    

‘아모르파티’ 역시 작가지향이 아니라 대중지향적이다. 물론 대중음악이라서 더 유리하겠지만 트로트+힙합+EDM이 콜라보되어 중장년층이 적응하기 어려웠던 곡을 윤일상 작곡가는 방탄소년단과 엑소를 홍보에 활용함으로써 영리하게 대중을 움직였다.

    

연극 역시 순수예술적 작품과 상업예술적 작품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둘을 어설프게 섞어서 실패를 한다. 순수예술도 관객과의 호흡은 중요하다. 순수예술이 관객에게 잘 전달되도록 서비스 한다고 상업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며 작가주의만 주장하고 관객들을 탓 할량이면 그냥 집에서 혼자 하는 게 낫다. 순수예술도 작품과 공연 내용이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세심한 서비스 전략이 필요하다.

    

넷째, ‘경숙이’와 ‘아모르파티’의 메시지는 같다.

‘아모르파티’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저서 《즐거운 지식》(Die fröhliche Wissenschaft) 등에서 언급한 개념으로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Fati)의 합성어라고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슬픈 일, 기가 막힌 일, 기쁜 일,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서 실의에 빠지고 재수 없는 운명을 원망하며 산다. 그런데 니체는 어차피 각자의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그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주도적으로 운명을 사랑하고 전진시키면서 살자고 했단다. 경숙이’ 역시 주인공인 경숙이의 눈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쓱 흩고 간다. 작가와 연출가는 ‘경숙이’를 통해서 “그 시대를 살아 낸 아버지와 어머니와 꺽꺽이와 자야의 삶이 얽히고 설키지만 다 그만하면 잘 살아냈어요, 그 시대를 함께 산 여러분도요~”라고 위로를 보낸다.

    

그래서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는 ‘아모르파티’이다.

    

안전한 작품보다는 지역성을 실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훌륭하고 감동적인 공연 중 조금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연출과 배우들은 빈틈없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이율배반적이지만 그래서 좀 아쉬웠다. 대한민국연극제를 위해서 제작된 것보다는 기존에 수없이 많이 공연되고 훈련되었던 공연이 올려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매니아로서 전남팀에게 부탁을 드린다면 내년에는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와 같이 잘 알려지고 안전한 작품 말고, 전라도 사람들의 정서와 소재로 쓴 작품들과 경상도 대사가 아닌 전라도 사투리로 된 대사를 듣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내년 대한민국연극제에는 대통령상을 의식(?)하지 않는 대담하고 창의적이며, 실험적인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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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01 [14:05]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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