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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률칼럼] 빙산의 밑
-교육감 선거에 임하며-
 
박병률 기사입력  2018/06/08 [08:53]

 

새가 우짖는다.  새벽·아침 맨 처음 들려오는 소리다.

 

멀리 희미하게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아...그래, 여기는 도시, 그것도 서울의 어느 아파트라는 공간이구나. 어릴 적 동네에 새벽이 오면, 꼬끼오~소리가 잠을 깨웠다.

 

지금은 시골에 가도 닭이나 강아지 우짖는 소리 하나 듣기 어렵다.

 

하노이에서 조금 떨어진 어떤 마을에 갔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느낌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리핀 민도르섬에 배낭여행 갔을 때도 똑같았다. 마당을 중심으로 한 편에는 소와 돼지, 마당엔 목줄 한 번 매여 본 적 없을 것 같은 견공들. 마당을 마음대로 다니는 닭들.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잊지 못했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는 방과 거실이 개인과 공공의 영역을 나눈다.

 

다 큰 아들래미 면도기 소리가 조급해지는 시간을 알려준다. 밥 짓는 소리와 구수한 찌개, 모두가 아침에 마주하는 그림이다. 윗 층 어르신은 오늘도 손주와 손잡고 등장 하실 것이고, 정문에는 엄마들과 어르신들이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운전하고 나가면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앞에 녹색 옷을 입은 엄마들이 여군보다 더 매섭고 엄격하게 깃발을 흔든다. 군대생활을 하고 나온 남자들보다 훨씬 더 쎈 군기는  운전대 잡은 내손에 더욱 힘이 가게하고, 브레이크 페달에 세심한 정성을 쏟게 만든다.

 

한 때 아이들도 천편일률적 교육시스템 속에 갇혀 양육되는 형태는 여전히 신체의 퇴화기관처럼 잔존한다. 어르신 손잡고 등교하는 손주의 모습은, 숱하게 명멸해 왔던 전통 중 하나다. 이제는 사회와 국가가 좀 더 참신하고 유연하게 대답할 차례다.

 

물론 옛 시절 그대로 돌아가 되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E·H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했다.

 

교육에 있어서도 성과지상주의를 넘어, 조화와 공감, 자연스러움의 회복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그려 나간다면, 아이들의 감성회복에 얼마나 좋을까? 국가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꿈과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경쟁에 내 모는 세상에, 누가 과연 아이를 자신 있게 내 놓을까?

 

나와 우리를 지금 현재 이곳에 있게 하고, 가장 원천적인 심연에 초미의 관심사로 자리잡고 있는 교육적 자산에 우리는 얼마나 참여하고 있었나?

 

불평등의 원천에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은 소위 학벌체제가 아닌가 한다. 빙산의 일각으로 보여지는 소득 불균형 등의 모습 이전에, 근본적인 교육불균형이나 재능의 다양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교육시스템 등은 빙산의 몸통이 아닐까? 정치와 이념 등의 맥락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교육제도는 이제 어떻게 변모해야 할까?

 

그 선두에서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할까? 이러한 중요한 교육의 장을 선출하는 일에 나는 얼마나 진중했었나. 급변하는 정치사회적 환경에 누가 과연 발빠르고 선제적인 정책과 대응을 제시하는 후보인가.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전 투표제와 선거일의 공휴일, 투표시간의 연장 등, 숱한 방법을 제시하여도, 나의 발걸음 하나가 동참하지 않으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 아름다운 꿈과 고향은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꺼지지 않고 남아있는 ‘작은 촛불’ 같은 불씨를 후대에 계속 건내고 이어나가 ‘큰 불’을 만들어 ‘손’녹이는 기적은 4차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될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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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08 [08:53]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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