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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련 칼럼] 그리운 아버지 사부곡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7/12/05 [10:55]

 

노오란 장미꽃을 한 송이씩 망사로 싸서 만든 화려한 꽃다발을 가을 성큼 다가와 단풍 곱게 물든 오솔 길을 지나 아버지 계신 곳에 꽂아 드리니 마음 한 구석 애잔히 자리 잡고 있는 옛 사랑이 물밀 듯 밀려온다.  
평생 근검절약하시고 부지런하시며 속 깊은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신 것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18주기가 되었다.  

 

어쩜 그리도 빠를까!  
한 바퀴 더 구르고 나면 나도 한 겨울에 서 있게 되는 건가?
11월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배가 많이 아프다 하셔 119에 실려 가셨는데 위에 구멍이 뚫린 ‘위천공’이란 진단을 받고 촉을 다투며 급하다고 하여 한밤중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나니 맥이 풀리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어두운 밤 길고 길게 느껴지던 셀 수 없는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수술을 잘 마쳤다며 제거한 부위를 직접 보여주니 두려움이 확 밀려오고 한 동안 우울하여 감정을 추수 릴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오신 아버지 몸을 만져 보니 바짝 마른 몸과 거친 손!  ‘어느새 이렇게 늙으셨나?’ 속이 아려왔다. 며칠 동안 조금씩 회복이 되어 한시름 놓았는데 어쩐 일인지 별안간 상태가 안 좋아지시더니 수술 보름 만에 길고 긴 이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임종 순간 하늘도 서러웠는지 11월 중순인데 별안간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천지개벽 할 것 같은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쳐 대며 대낮인데 온 세상이 깜깜해져 나도 한참을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 배 위에서 춤을 추고 재롱을 부렸다.  노래하라 하면 노래하고 춤추라 하면 춤을 추고...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무뚝뚝하셨지만 아버지는 온 정성을 쏟으셨다.
병원에 입원하여 초등학교 입학식 참석도 못하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는 다칠세라 깨질세라 전전긍긍하시며 아침이면 씻겨주시고 머리도 감겨 주시며 양 갈래로 머리를 땋기도 하고 말아 올려 주기도 하며 뿌듯해 하셨다. 엄마는 머리를 잘 만지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시며 귀밑 2센티 단발머리 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나의 전속 미용사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자상한 아버지 사랑이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온 가족 월미도 해변으로 놀러가 아버지가 따라 주던 처음 맛보는 사이다에 코가 찌릿하여 깜짝 놀라 호들갑 떨던 기억도 나고 가끔 영화의 거리 충무로에 데리고 가서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보여 주시고 짜장면도 사 주시고 그런데 ‘다 못 먹지?’하며 짜장면을 덜어 가시면 속으로 얼마나 아깝던지... 다 먹을 수 있는데..
그 짜장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거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맛 참으로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득하다.   

 

예전엔 아버지 밥상을 따로 차려 드렸는데 아버지 밥상에는 우리 상에 없는 굴비와 계란찜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계란찜 두어 수저 드시고 우리 상으로 밀어 주시고 굴비도 뼈를 발라 우리 상에 슬쩍 올려 주시면 우리는 신이 나서 맛나게 나누어 먹던 기억도 새롭다.


그러던 1960년대 어느 날 아버지 사업이 크게 망하면서 집안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번 씩 많은 손님들이 오셔서 불고기 파티를 했었는데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우리가 살던 집까지 팔아 빚 정리를 하며 아버지는 큰 충격으로 긴 시간 칩거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다행이 생활력 강한 어머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쌀과 연탄을 파는 가게를 내셨고 나는 졸지에 부잣집 딸에서 가게 집 딸로 변신하게 되었다.


어느 날 엄마가 천식으로 숨이 차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데 연탄 주문이 들어와 연탄 배달을 하게 되었다.   연탄집게를 양 손에 들고 연탄을 2장씩 나르는데 세상 태어나 이렇게 힘든 일을 처음 해 본 나는 어찌나 힘이 들던지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연탄 100장을 2장씩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왔다 갔다 하는데 그 길이 왜 그리 멀고도 먼지...  그 느낌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아버지가 아시고 연탄 팔지 말라고 불처럼 화를 내셔서 연탄 가게는 문을 닫게 되었지만 그 덕분인지 나는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몸이 몹시 날래고 빠르신데 나는 몸이 허약하고 비실거린다고 새벽마다 모래주머니를 내 다리에 채우고 함께 달리기를 하셨다.  운동 선수 훈련하듯 강도를 높이며...  지금도 그때의 힘들었던 순간과 신선한 공기가 새록새록하고 그 덕인지 건강은 많이 좋아졌다. 사실 겁 많은 나는 아버지가 많이 무서웠었다.


청춘 시절은 사춘기와 가난이 함께 뒹글다 보니 독일 철학자 비판 정신을 가졌던 ‘쇼펜하우어’ 염세주의에 빠져 인생무상 삶의 허무를 운운하며 깊은 고통의 수렁 속을 헤메었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대화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철이 좀 들고 나서야 남동생 내외와 함께 사시던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릴까 생각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지를 차려 드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흰 쌀밥에 불고기를 차려 드렸더니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신다. 눈물의 보릿고개를 넘어온 옛 어르신들에겐 흰 쌀밥이 최고였다. 가끔 흰 바지를 빨아 햇빛에 널어놓고 하얀 신발도 닦아 드리고 다림질도 해 드리면 며느리는 안 해 준다고 은근 슬쩍 역성들어 달라고 하신다.  
나는 딸이라 해드리는 거라고 하며 용돈을 두둑이 드리면 아버지는 금방 신이 나셔서 친구들 커피나 사 주어야겠다고 딸 자랑하러 가시곤 했다.


내리 사랑 부모 마음은 나이 먹고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지만 많은 세월 지나고 보니  애틋한 기억이 마음 깊이 사무쳐 후회가 몰려오고 생각할수록 불효했던 것들이 자꾸 생각나 죄스럽고 마음이 무겁다.
아련한 추억이 많이 쌓인 아버지와 지내온 오랜 시간은 그리움도 더 깊게 한다.
낙엽 품은 가을 속에서 나도 이제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인생길을 홀로 걷는다.  


엄마가 걸어갔고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따라가고 있다.
어릴 적엔 부모 사랑으로 꽃길인지 자갈밭인지 알지도 못하고 걸어갔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사랑으로 잘 교육받아 남편과 함께 자녀를 양육하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거칠고 힘든 길을 구비 구비 잘 돌아왔다.
사랑을 몸으로 실천해 주신 아버지 엄마 덕분에 지금은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


‘정순익’ 아버지께 이 글을 바치며 평생 말해보지 못한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와 소소한 추억을 내 인생 끝자락까지 기억하며 그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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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05 [10:55]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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