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련 칼럼] 울엄마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17/09/13 [14:04]

[한국인권신문=안현희] 5월의 훈풍이 아스라한 엄마의 손길처럼 스치니 문득 엄마 생각에 알 수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엄마~~ 셀 수도 없이 많이 불러대던 그 이름!  이 나이에도 애잔함과 아련함이 묻어나는 그 이름!

엄마아 ~
자녀들 일이라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신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그 사랑을 먼 훗날에야 깨달고 이제야 먹먹한 마음으로 엄마의 사랑을 헤아려 보며 ‘황화식‘ 나의 엄마를 기리어 본다.

초등학교 입학식 즈음하여 자다가 깨면 기침이 멈추지 않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몹시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1960년대는 의료 혜택 받기가 어려웠는데 운 좋게도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병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목구멍에 종양이 생겨 점점 자라나 숨구멍을 막았고 보름 정도만 늦었으면 가망이 없을 뻔 했단다.

다행이 양성 종양이었고 목 한 가운데를 절개하고 수술한 후 쇠처럼 생긴 통을 목에 고정시키고 2·3시간에 한번 씩 피고름을 뽑아내는 석션을 엄마는 밤을 새며 두려움에 떠는 나를 달래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간호해 주셨다. 제대로 소독이 안 되면 성대에서 쇳소리가 나거나 굵은 남성 목소리로 변할 수 있다고 하여 엄마는 더욱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셨던 것 같다.

지금도 노래할 때 엄마가 생각나면 보고프고 감사하여 울컥하기도 하고 남아 있는 수술 흉터는 엄마의 사랑의 징표로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다. 내가 어릴 적엔 모두가 살기 어려웠는데 우리 집은 2층 양옥집에 나보다 더 큰 세퍼트가 있었고 장롱 위에는 말을 잘 들을 때마다 꺼내 주던 커다란 사탕 봉투가 있는 나름 부잣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었지만 생활력 강한 우리 부모님은 더 열심히 사시며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셨다.

나에겐 언제나 예쁜 옷을 맞춰 입히셨고 코트와 모자까지 셋트로 맞춰 입히니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무척 부잣집 딸인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엄마 옷은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없었고 참 예쁘고 곱게 생기신 울 엄마가 그렇게 자식 위해 고생만 하신 것 그때는 철없어 잘 몰랐다. 남동생이 자전거 바퀴에 발이 끼어 다쳤을 때도 엄마는 당신의 살을 떼어 붙여 주신다고 하셨다. 자식 일에는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 날은 여동생이 장염이 심해 밥을 못 먹자 엄마는 며칠 동안 죽을 쑤어 학교에 가셔서 죽을 먹이고 오셨다. 그때는 양은 도시락도 없어 밥을 굶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엄마는 집에서 굶으셔도 우리에겐 보온 도시락에 밥을 싸 주셔서 도시락 없는 친구들과 많이 나누어 먹기도 했으니 울 엄마는 우야꼬?

우리는 밥을 안 먹으면 학교에 못가는 것 인줄 알았다. 어찌나 지극 정성으로 먹이시는지… 그 모습이 눈에 선하고 아련하다. 엄마가 늘 김치에 밥 말아 드시는 것은 시간이 한참 많이 흘러서야 어렴풋이 알았다. 어느 날 오징어를 구워 다리 부분을 쭉 찢어 엄마에게 드렸더니 별안간 핀잔을 주셨다. “나이가 서른이 되도록 아직도 엄마 마음을 모르니?”하시는 거였다. ‘아니! 하던 대로 했는데 왜 그러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 후 3살짜리 아들이 사과 꼭지를 가져오더니 나보고 먹으란다. 내가 늘 사과 꼭지만 먹으니 갖다 준 것 같은데 웃음이 저절로 났다. 뿌린 대로 거두나? 아들은 철저히 훈육을 시켰다. 나같이 될까봐! 나이 서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철이 없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은 죽을 때까지 안 나는 것 아닌가 싶다.

엄마의 사랑은 늘 당연한 것이고 항상 그대로 계시는 줄 알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만 알았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는 나를 낳으시고 몸조리를 잘 못하시어 천식에 걸려 늘 숨이 많이 차셨고 기침도 많이 하시며 늘 고통스러워하셨다.

인생의 아득히 먼 길을 돌아와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며 세월의 한 복판에서 엄마의 인생 끝자락과 마주하며 한 많은 생을 정리하고 숨결이 바람에 날릴 때까지 애타게 자식 걱정만 하셨다. 그때 엄마 연세가 63세였는데 조금만 더 사셨으면 엄마 닮아 싹싹하고 정 많은 내가 엄마를 많이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었는데… 후회와 만감이 교차한다.

제일 후회되는 것은 돌아가시기 삼 일전에 숨을 몰아쉬시며 청소하고 가실 때 용돈을 조금 드린 것이 두고두고 죄스러웠고 평생을 좋은 옷 한번을 못 사드리고 입관할 때 제일 값싼 수의을 입힌 것이 늘 한스럽고 가슴 아프고 속상했다. 그런데 슬프게 장례를 치르던 첫째 날 밤에 별안간 불을 켜 놓은 전등마다 무지개가 떠 있어서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눈을 부비고 보아도 전등마다 무지개가 사방에 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인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밤새도록 무지개가 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살아생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제 강점기를 넘기고 6.25 전쟁을 겪고 결혼 후엔 병을 얻어 고통과 고난의 길을 사셨지만 엄마의 덧없이 사라져 가는 인생길이 영광의 무지개 길이라 생각하니 슬픔 속에서 감사가 나왔다.


23“엄마! 하늘 나라에서는 잘 계시지요?
엄마의 자녀들 모두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아요. 걱정마세요!
엄마의 한없는 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주셨고 몸 바쳐 사랑한 그 한없는 은혜 잊지 않고 나누며 살겠습니다.
엄마아 ~ 사랑합니다 ~
목이 메어 불러보며 하얀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수많은 인연 중에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감사했습니다.“

우주가 지구를 품고 있듯 세상을 품은 울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꽃이 피고 지는 많은 날들을 하염없이 보내고 이제야 봄 햇살처럼 따스한 엄마의 사랑을 마음 깊이 헤아려 보며 끝없는 사랑을 노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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