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청호 칼럼]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광화문 광장, 그리고 휘날리는 태극기(4)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16/11/27 [20:24]

 

    

[한국인권신문=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장 황청호]     

 

호치민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다산 정약용의 모습   

    

죽어서 반드시 누어있는 호치민의 모습! 그는 저 바딘 광장의 국기인 홍기아래에서 베트남의 독립선언문을 아래와 같이 낭독한 사람이다.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보자.

    

    

<베트남 독립선언문>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습니다. 이 불후의 명언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 있는 말입니다. 더 넓게 보면 그 말은 전 세계적으로 모든 민족들이 서로 평등하게 태어났고 모든 민족들은 생명과, 행복할 권리와 자유의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1791년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문’에서도 “인간은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하므로 누구든지 항상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어있다”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최근 80년 동안 프랑스 식민 집단은 ‘자유-평등-박애’란 깃발을 이용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우리 국민들을 억압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인륜과 정의에 완전히 역류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결코 한 푼어치의 민주적 자유도 주지 않았으며, 야만적인 법률을 시행했고, 우리나라의 통일과 우리민족의 단결을 차단하기 위해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각각 다른 제도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학교보다 감옥을 더많이 세웠으며,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을 냉혹하게 죽였으며, 우리의 항거를 모두 피바다에 씻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여론을 구속하고, 우민정책을 시행했으며, 아편과 알코올로 우리국민을 쇠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우리 국민들을 뼛속까지 착취하여 우리민족을 가난하고 궁핍하게 했고, 우리나라를 삭막하고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우리의 논밭, 광산, 원료를 모두 탈취해갔고, 지폐인쇄, 수출과 수입의 독점권을 모두 자기네 손아귀에 움켜잡았습니다.

    

그들은 무리한 세금을 수백종류를 만들어 우리민족을, 특히 우리 농부와상인들을 빈곤하게 했으며, 우리의 자본가들을 고개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동자들을 매우잔인하게 착취했습니다. 1940년 가을, 일본파쇼정권은 동맹파를 공격할 기지를 넓히기 위해 인도차이나를 침략했을 때, 프랑스 식민 집단은 무릎을 꿇어 항복했고, 우리나라에 일본군이 발을 내딛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국민들은 프랑스와 일본의 이중탄압을 당하게 되었고, 생활은 더욱더 곤궁하고 핍절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Quang Tri(꽝찌)에서 Bac Ky(박끼-북부베트남)까지, 우리 동포들이 2백만 명 더 넘게 굶어죽었습니다. 올해 3월 9일에 일본군은 프랑스군의 무기를 박탈했습니다. 프랑스군들은 도망치거나 항복을 했습니다. 이리하여 프랑스 식민 집단은 우리 민족을 보호 하기는 커녕, 오히려 5년 만에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일본에게 팔아넘긴 것입니다.

    

3월 9일전에 월맹은 일본을 축출하기 위해 프랑스연맹에 얼마나 많이 호소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프랑스 식민 집단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다시 월맹을 더 냉혹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집단이 패배하고 도망갈 때 Yen Bai 와 Cao Bang(정치범 수용소가 있었음)의 정치범 대다수를 야만적으로 학살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에게 우리 동포들은 여전히 관대하고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3월 9일 사변 후에, 월맹은 많은 프랑스 인민들을 국경을 넘어가게 도와주었고 일본감옥에서 도망치게 해주었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사실 1940 년 가을부터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되었으며 더 이상 프랑스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동맹파에게 항복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정권을 쟁취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실로 우리 인민은 프랑스 손아귀가 아니라 일본 손아귀에서 다시 나라를 찾은 것입니다.

    

프랑스가 도망가고 일본이 항복하며 Bao Dai 왕(베트남의 마지막 왕)도 퇴위하였습니다. 우리인민은 베트남이란 독립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결국 100여년의 식민지사슬을 끊어버렸고, 또한 수십 세기의 군주제도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제도를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베트남의 임시정부인 우리는 베트남 전체인민을 대표하여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협정들과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모든 특권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체 인민은 상-하가 한마음으로 프랑스 식민 집단과 그들의 음모를 절대적으로 반대합니다. 우리는 테헤란과 Cuu Kim Son(중국의 지방이름) 회의에서 민족평등원칙을 인정한 동맹 국가들이 결코 베트남 인민의 독립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한민족이 80여년 내내 프랑스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맞섰고, 한민족이 10여년 내내 파쇼를 반대 하기위해 용감하게 동맹 편에서 있었는데, 그런 민족은 마땅히 독립을 찾아야하고 그런 민족은 마땅히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우리는 세계에 정중하게 선언합니다. 베트남은 독립과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또 사실 자유와 독립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의 전 민족은 그 독립과 자유의 권리를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모든 정신과 역량, 생명과 재산들을 바칠 것을 결의하는 바입니다.

    

    

나는 베트남의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상기하며 호치민의 얼굴을 바라본다. 베트남인들의 피, 땀과 눈물의 역사로 이룩한 조국독립, 그 독립을 호치민은 어떻게 이룩했으며 어떻게 지켜내고자 한 것일까? 그리고 그 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다시 한 번 호치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휘날리는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 홍기를 무심히 바라다본다.

    

베트남의 국기인 금성 홍기는 1945년 9월 29일 베트남이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할 때 처음 만들어졌고,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후인 1955년 11월 30일, 이전 기에서 별의 5각을 더욱 날카롭게 수정하여 북(北)베트남의 국기인 ‘금성홍기(金星紅旗)’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1976년 전 베트남 통일 때 통일국가의 국기로 비로소 정한 국기이다. 문제는 국기 안에 담긴 베트남의 민족정신이다. 베트남은 이 민족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금성 홍기의 바탕색인 빨강색에는 혁명에 흘린 베트남전사의 피를, 그리고 황색 별 다섯 가지의 빛에는 베트남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 군인들의 일치된 단결을 나타내도록 그려낸다.

    

우리들은 호치민이 낭독한 독립선언문과 베트남의 홍기 속에 흐르는 민족정신을 통해 베트남의 현대사적인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호치민은 이러한 베트남의 민족정신은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일까? 나는 다시 한 번 호치민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그런데 호치민의 얼굴 속에서 친근감이 있는 한 아저씨의 얼굴을 찾아낸다. 바로 전 베트남국민들이 호치민을 지칭하여 부르는 ‘호 아저씨’ 이다. 국부를 아저씨라 부르는 나라! 이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아니 전 세계에서 어느 국가가 국가권력의 상징인 국부를 이처럼 아저씨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아닌 베트남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호치민은 어떻게 국가권력을 쥔 자신의 얼굴을 아저씨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들이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얼굴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은 주어진 사색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또한 사색은 자신의 삶의 수행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나는 다시 한 번 호치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호치민의 얼굴에서 다산 정약용의 얼굴을 발견한다.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다산 정약용(1762:영조 38∼1836:헌종 2)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급변하는 조선사회의 권력사회에서 밀려나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긴 사람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는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들은 이 다산 정약용 그냥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산 정약용의 퇴진 후, 당시 조선사회는 급격한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에 이어 조선사회의 르네상스 문명을 일으키려던 정조대왕의 사후, 조선사회는 다산 정약용을 천주교 박해사건을 빌미로 하여 강진으로 유배시켜 버린다. 바로 한 위대한 천재를 사장(死藏)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조선사회의 권문세가들은 본격적인 사색당쟁의 권력싸움으로 접어든다.

    

급기야는 이러한 권력싸움의 국력소모로 인해 일본에 의해 조선은 망하고 만다. 그런데 조선사회가 버린 다산 정약용의 정신을 조선이 아닌 호치민이 받아들여 베트남을 일으키는 국력의 발판으로 삼는다. 다산 정약용의 사상은 한 마디로 친근과 청빈으로 경제적인 부를 이룩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사상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하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경제학을 넘어서는 위대한 사상이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도덕철학을 바탕으로 경제학이다. 즉 사회인문학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를 재건하는 국가부흥이다. 다산 정약용의 이러한 국가운영과 재건정신은 바로 그의 저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호치민! 그는 전쟁으로 얼룩진 베트남을 다산 정약용의 학문으로 재건시키고 독립시킨 것이다. 바로 국민에 대한 친근함과 청빈함의 경제정치철학이다. 그렇기에 그는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 라 불리우며 패타이어의 슬리퍼를 신고 베트남을 독립시킨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호치민의 얼굴에서 다산 정약용의 고단한 얼굴을 발견한다. 그리고 무심히 긴 한숨을 스스로 토해내며 호치민의 묘소를 벗어나 바딘 광장으로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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